펌 썰
처음 만났을때, 나는 연대생이었고 그녀는 여고생이었다 - #22 ~ #23
모네.
2016. 7. 4. 01:59
#22. 회상, 2008년 10월 20일
시간은, 또다시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나는 그것을 예상했으면서도 실감하지는 못하고 있다. 나는 아
직까지 연대생이지만, 너는 이제 여고생이 아니다. 너와의 사랑. 나는 시간이라는 계단을 거슬러 우리
가 해후했던 그날을 다시금 추억한다. 흘러가는 시간은 조금씩 살갗을 파고들어 나를 아프게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23. 첫눈.
첫눈이다. 나는 하숙집 창문을 열고 그걸 바라본다. 펑펑 쏟아지지는 않지만 진눈깨비가 서울 거리에
소복이 내려앉는다. 술집으로 뒤덮인 신촌이지만. 그날만큼은 순백하다. 깨끗하다. 사람들은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신촌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손시연의 하늘에서도 흰 눈이 내릴까. 그녀도 나와 같은 세
상을 보고 있을까
너를 사랑한다는 게 확실해진 지금. 나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잠깐, 생각나버렸어. 너와의 약속 넌 그
약속을 지키려고 정말 싫어하는 공포영화까지 같이 봐줬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도 끝까지 약속
을 지켜 줬었는데 나는 오래 뒤에 일이라 치부해버리고 잊고 있었어.
네 생일날 학교 찾아와서 선물 주기. 오늘이 바로 그날이야. 그래서 눈이 내리나봐 미안해 손시연.
나 이렇게 해야만 할 거 같아. 아니해야만 해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어. 나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더 이상 주저할 수 없다. 여기서 주저해버리면 평생 일어나지 못하고 주
저 앉아서 괴로워할 것 같다. 나는 어디론가 향한다. 흰 눈이 내 머리와 옷에 이리저리 달라붙어서 녹
아내 린다. 휴대폰으로 연락을 한다. 만나고 싶다고 할 이야기가 있다고. 그렇게 도착한 그곳에는 그녀
가 서있다.
강소영이다. 내가 사랑했던 그녀. 서로에 대한 오해 때문에 사랑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었던 우리
강소영은 처음 만나던 날 모습 그대로 내 눈앞에 서있다. 어깨너머 흘러내린 긴 생머리, 고등학교 때와
는 많이 달라진 옷차림, 예전과는 다르게 슬픔이 가득해진 눈만 제외하고는. 나는 소영이에게 다가가
두 손을 잡는다. 이제 소영이가 선물했던 장갑은 더 이상 내 손을 감싸고 있지 않다. 대신 소영이의 하얀
두 손이 오래전 그날처럼 나를 따듯하게 감싸주고 있다.
'소영아. 우리 사랑했었잖아. 그걸 숨기고 지우려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아무리 마음 아프고 슬프더라
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잖아.'
사실 나,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는데. 단지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으로 끝나는 첫사랑이 아니라. 소영이 네가
머리 하얗게 되고 주름으로 뒤덮인 할머니가 되더라도 껴안아 주고 싶었는데
'성민아...'
'미안해. 너한테 너무 냉정하게 대한 거 같아. 내 마음이 아프다는 핑계로 차갑게 대한 것 같아. 사실,
난 이기적이었어. 너와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라이벌에 대한 경쟁의식 때문에. 내 개인적인 야망과
욕심 때문에 너를 외롭게 했어. 그러면서도 나는 널 원망하고 미워하기만 했어.'
소영이가 슬픈 눈을 들어서 나를 쳐다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 내가 사랑했던
눈. 나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응시한다. 그렇게 소영이와 솔직하게 마주한다. 더 이상 우리를 가로막
있던 오해는 없다. 거짓으로 잊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던 구속도 없다.
'어떡하지 소영아?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을 사랑하겠다던 약속. 지키지 못할 거 같아. 나 너 말고 사랑
하는 사람 생겼다? 그런데도 널 잊지 못 해서 매일 괴로워야 했어. 그런데 지금 다른 사랑을 시작하려
고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하려고 해.'
소영이의 맑은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소영이의 손이 가볍게 떨린다. 나는 그 손을 꼭 잡아
준다.
'성민아 진심이야? 나 말고 다른 사랑 시작할 수 있어? 정말 그런 거야?'
'우리 앞으로 상처받고 아프더라도 흔들리지는 말자 다른 사랑에게는. 잊지 못하더라도 외면하지 말자
새롭게 다가오는 사랑을.'
'아프지 마 성민아. 내 잘못이잖아. 너는 아파하지 마 성민아.'
'고마웠어. 정말로 사랑했어 소영아. 나 이제 그만 돌아갈게. 나쁜 놈이라고 욕하지 말아줘. 이번엔 진
짜야. 전에 널 만났을 때는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어. 그런데 지금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 너를
잊지는 못하겠다고, 하지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고.'
나는 꼭 잡았던 두 손을 살며시 놓고 뒤돌아서서 어디론가 뛰어간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뛰어간다.
소영이를 남겨둔 채로,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눈물이 흐른다. 나는 그렇게 소영이와의 기
억을 마감한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새로운 사랑을 만나야 하기에.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어느 시점에서부터가 소영이에게서 멀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시연과 가까워지기 위해 달려
가고 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어느새 나는 손시연의 고등학교 앞에 도착해있다. 손시연의 교실을
찾아간다. 많은 여학생들이 자리에 앉아서 자습을 하고 있다. 손시연은 어디에 있는 걸까. 아니,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어디에 있는 걸까.
'시연이요? 오늘 아프다고 자습 안 하고 먼저 갔는데요?'
손시연이 어디 있는지 묻는 나에게 한 여학생이 그렇게 대답해준다. 결국 나는 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 했다. 학교로 찾아왔지만 선물을 건네주지는 못 했다. 내 잘못이다. 모두. 나는 이제 너를 어떻게 만
나야 하는 걸까. 다시 한번 학교를 찾아와야 할까. 다시 시작하자고 연락을 해야 할까. 너의 집 앞으로
찾아가야 할까.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흔들리지 않는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은데.
나는 꽃다발과 선물을 들고 터벅터벅 하숙집으로 걸어왔다. 꽤 먼 거리였지만.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안
았다. 힘들지 않았다. 단지 손시연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쉬움 만이 나를 감싸고 있다.
숨을 몰아쉬면서, 초췌해진 몸을 이끌고 나는 하숙집 대문을 연다.
그곳에 누군가 있다. 손시연이다. 처음 만나던 그날처럼 교복을 입고 있다. 꽤나 오래 기다린 듯한
모습이지만 예전 그날처럼 화를 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주 조금 두려워하고 있다. 나와 다시 마주하
는 그 순간을 손시연은 어색한 듯 나를 쳐다보지 못하고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는 그런 손시
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시간이 꽤 많이 지나서야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손시연의 얼굴, 손시연의 눈빛이 내 눈앞에 다가온다.
'나쁜 아저씨 말이 맞았네요? 청송대에서 소원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
손시연은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활짝 웃고 있다. 다행이야. 바보 같은 난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너의
소원이 이루어져서 나의 소원도 이루어져서.
나는 손시연을 끌어안는다. 조금 더 일찍 끌어안아 줬어야 했는데. 소영이 때문에 흔들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렇게 작고 연약하기만 한 너에게 난 내 모든 걸 의지했었는데. 사랑했었는데.
'아저씨, 오늘은 또 왜 이렇게 초췌해요? 좀 멋진 모습이면 안 돼요? 그래도 사랑해요 아저씨. 조인성보
다도 훨씬 사랑해요. 이런 모습이라도 괜찮아요.'
나는 손시연과 마주할 때 언제나 솔직하지 못 했다. 속 마음을 숨기고 냉정하고 까칠하게만 대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숨기지 않고 싶다. 내 속마음을 언제나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외쳤으면서도 퉁명스
러운 청해야 했던 나의 마음을...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시연아.'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처음으로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간다. 우리 둘의
입술에는 서로의 눈물이 묻어 있지만 상관없다. 손시연의 하늘에서도, 나의 하늘에서도 눈이 내리고
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너를 사랑할게.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연대생이었고 그녀는 여고생이었다.
ㅡ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