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회상, 2008년 9월 17일, 서울

내가 우리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몰래 훔쳐봤었더라면, 시간을 되돌려 하숙집 앞에서 너의 라이터

와 담배를 빼앗을 수 있었을까? 너는 그렇게 내 집 앞에서 4시간 동안 기다리며 나를 원망하고 몰아세

울 수 있었을까?

2006년 여름 즈음에 우연히 만났던 나와 너의 이야기는, 단지 쓸쓸한 기억으로 잊히고 말 것인지.

#5. 비와 그녀

강의실 밖에는 비가 아주 조금씩,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오전만 해도 밝았던 교정이 우울하다 싶을 만

큼 구름에 둘러싸여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우산을 챙겨온 터라, 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내가 비 내리는 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우울한 날씨에 고등학교 때 사귀던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받았기 때문이다. 안 좋은 예감은 빗나가는 적이 없다. 특히나 이렇게 비 오는 날

씨에는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미안해... 성민아. 그런데 나 자신이 없어. 내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기다릴 수 있을지, 다시 공부해야 하

는 너한테 짐이 되지는 않을지. 우리 친구로 지내면 안 될까? 나는 그러고 싶어.'

그래.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냐? 수많은 여자애들이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유명한 여대잖

아. 너도 이제 신입생인데 남들처럼 미팅도 하고 대학생들한테 고백도 받고 그런 특권쯤은 있어야 겠

지. 나는 너를 못 붙잡아. 그러니까 선택은 네가 했어야 했어. 왜 울어? 네가 울 이유는 없잖아. 차라리

내가 제발 떠나지 말라고 무릎 꿇고 울면 모를까.

갑자기 민망하다 싶을 만큼 엄청난 휴대폰 진동이 귓가를 때린다. 책상 위에 폰을 그냥 올려놨던 내 잘

못이다. 

교수님은 짐짓 모르는 척 수업을 계속 진행하고 몇몇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이쪽을 쳐다본다. 나는 서

둘러 무음모드로 바꿔놓은 다음 문자를 확인한다.

[저 지금 학교 끝나고 아저씨네 집 앞으로 가고 있는 중이에욤. 한 20분 뒤쯤 도착할 듯.]

너도 참... 분위기 깨는 데는 선수구나. 왜 얘만 등장하면 늘 똑같던, 늘 그랬던 분위기가 한 번에 뒤집히

지?

[응. 나도 그때쯤에 수업 끝나서 바로 갈 거야. 없어도 잠깐만 기다려]

딴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벌써 교수님이 수업을 마무리 짓고 있다. 종합관 건물 밖으로 나가니 아까 보

다 빗줄기가 훨씬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반 친구들 몇 녀석이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성민아, 위닝하러 가자'

'야, 오늘은 안되겠다. 누구 만날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오~누구? 여자냐? 여자?'

그러고 보니, 성별로 따지면 여자는 여자로군. 여자 만나러 가는 게 맞기는 맞네.

친구들보다 앞서서 걸어가고 있는데, 문자가 한통 더 도착한다. 여고생으로 부터다.

[지금 맥도날드 앞에 있는 지하철 출군데요.... 비 와서 못 나가고 있어요ㅠ 이쪽으로 좀 와주면 안 돼요?]

우산 안 가져왔니? 준비성 하고는... 귀찮긴 하지만 안될 건 없지. 나는 간단하게 답 문화고 3번 출구 쪽의

로 걸어간다.

비가 내리지만, 3번 출구 앞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다들 만나면 행복한 연인을 기다리고,

친구를 기다리고 있겠지. 나는 뭐지? '내가 빼앗아간 라이터 받으려고 기다리는 애'를 만나러 가는 거

구나. 진짜 이건 정말이지 별로다.

그 여학생을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보면서 조용히 서있는 그 애한테 다

나가서 어깨에 살짝 손을 댄다.

'어. 안녕하세요. 우산을 안 가져와서요. 미안요.'

미안하다고? 나는 왜 비 오는 날에 여자들한테 미안하다는 소리밖에 못 들을까. 잠깐만, 그러고 보니 네

가 미안할 건 또 뭐냐? 내가 라이터 가져가서 네가 몇 시간 동안이나 기다리고 몇 번이나 신촌으로 와야

했던 건데.

다시 보니 어제 흥분했던 모습에 비하니까 많이 차분해진 모습이다. 그래, 차분해지니까 좀 낫네.

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제처럼 까칠하게 대들었다면 내가 미안하진 않았을 텐데.

'야, 너 저녁 먹었어? 내가 미안한 것도 있고... 밥 사줄게, 먹고 가.'

여고생은 의외의 제안이었던 듯, 잠시 고민한다. 그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친구들이랑 저녁을

먹기로 했었는지,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야 오늘 너희들끼리 그냥 먹어. 나 공짜로 먹는다 밥. 응? 아 그냥 아는 오빠랑'

그러면 그렇지 네 핵심은 바로 '공짜밥' 이었구나. 이거 나중에 대학 들어가면 된장 포스 좀 풍기겠는데?

아는 오빠라... 그래 어떤 의미에서 '아는' 오빠인 건 맞지. 내가 '여자' 만나러 가는 거처럼

나는 파스타 투웰브로 가려고 마음먹고 발걸음을 돌린다. 그때 뒤에서 여고생이 나를 부른다.

'나 우산 없다니깐요.'

아 참, 그렇지 같이 쓰고 가야겠네. 내가 먹자고 했으니, 우산도 씌워주는 게 맞지. 근데 뭔가 사모님

모시고 가는 최 기사가 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야 네가 약간만 앞으로 가. 내가 씌워줄게'

막상 같이 우산을 쓰고 가니까 분위기가 좀 어색하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화장도 거의 안 한 거 같은데

피부는 좋네. 키는 163정도? 근데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나이 먹어서 주책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파스타 투웰브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더 많다. 여고생이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가 나한테 묻는다.

'뭐가 맛있어요? 해물 소스? 토마토소스?'

그냥 아무거나 시키지. 나는 화이트소스가 좀 느끼하기는 한데 한번 먹어보라면 주문해준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마주 앉아 있으니까 정말 할 얘기가 없다. 이거 무슨 소개팅도 아닌데 왜 이렇게 뻘쭘한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너랑 나랑 공감대를 형성할만한 무언가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구나.

아! 이름.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네. 그런데 나는 방금 네 이름을 알았어. 네 가슴에 붙어있는 명찰에서.

'손시연'

내가 명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까 어색했는지, 여고생이 가슴 언저리를 툭툭 털며 나한테 물어

다. 

'뭐 묻었어요? 왜 계속 이쪽 쳐다봐요?'

잠깐만, 목소리 뉘앙스가 '이 변태야 왜 계속 가슴 쳐다봐!' 대충 이렇게 들린다? 나 변태 아니거든, 네

가슴 쳐다본 것도 아니고. 어린애 가슴 같은 거 관심 없거든?

'너 어디 고등학교야? 몇 학년?'

'S 고등학교 2학년이요. 아저씨는 대학생이에요? 어디? 연대? 서강대?'

'연세대, 나 신입생이야.'

'오~!연세대. 공부 잘했나 보네. 나 연세대 들어가면 아빠가 정말 좋아할 탠데.'

공부? 내가 경쟁상대로 생각한 애보다는 못했어. 모의고사랑 내신 10번 시험 보면 8~9번은 그 녀석이

점수가 더 높게 나왔거든. 그게 늘 스트레스였고. 그래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공부 잘한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 근데 그놈의 경쟁의식 때문에 늘 불만족스러웠어. 성적에 있어서는.

'그럼 아저씨는 고등학교 때 모의고사 다 1등급 받고 그랬겠네요? 반에서 1등도 하고? 나는 반에서 15

등안에 겨우 드는데.'

애는 애구나. 하기야 저 때 관심사가 다 그렇지 뭐. 너는 몇 등급이냐 전교 몇 등이냐 이런 거.

'근데 너 아까부터 왜 계속 아저씨 아저씨 거려 나 86년생이거든? 너 몇 년 생인데?'

'저 빠른 90이거든요? 와 86년생이래. 완전히 아저씨다 아저씨.'

헉, 90년생. 시간의 갭이 있기는 있다. 나는 올림픽 보면서 걸음마 뗐는데, 너는 그때 이 세상에 존재하

지도 않았구나. 어떻게 보면 아저씨가 맞기는 맞네. 근데 꼭 그렇게 불러야 돼? 완전 노친네 된 느낌이라

구. 그래도 생각보다 분위기 안 어색하고 괜찮아졌네.

분위기 안 어색해져서 좋기는 한데 너랑 나, 진짜 공통분모가 하나도 없다. 이름도 달라, 성격도 달라,

나이도 달라, 성적도 달라, 이건 뭐 공유할게 진짜 없네.

맞다. 라이터 돌려 주기로 했지. 까먹을뻔했다.

'라이터 받아.'

'아! 깜빡할뻔했다. 바본가 봐 바보.'

나야 그렇다 치고, 얘는 왜 이래? 라이터 받으러 온 애가 그새 그걸 까먹니? 어제 그렇게 라이터 내놓으라

고 울고불고 난리 브루스를 추더니.

'근데 이거 되게 비싼 건가 보다? 이게 그렇게 중요한 거였어?'

그때 갑자기 여고생의 얼굴이 완전히 울상이 된다. 어? 얘 또 우는 거 아니야? 분위기 왜 이래?

'나.. 아빠랑 여동생이랑 셋이 살거든요. 엄마가 나 중학교 때 돌아가셨어요. 그거 엄마가 아빠한테 젊

었을 때 사준 거라, 아빠가 엄청 아끼는 거란 말이에요.'

아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미안 미안. 이런 반응을 바라고 말한 게 아닌데. 아 진짜 이런 거 너무 싫다. 나는 왜

누가 내 앞에서 울려고 하는 게 정말 싫지? 나까지 슬퍼지려고 해. 아무리 봐도 너 진짜 애는 애다. 어제

는 그렇게 까칠하더니만...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울상을 짓냐? 너 이런 이미지 아니잖아?

나는 빨리 대화의 화제를 바꾼다.

'되게 중요한 거였네. 내가 진짜 미안. 스파게티는 어때? 맛있어?'

'조금. 솔직히 약간 느끼한 거 같은데 먹을 만은 해요.'

나는 그때 다시 깨닫는다. 얘는 어머니가 없구나, 나는 아버지가 없는데 부모님 중에 한 분이 안 계시는

거. 이것도 공통분모라면 공통분모네. 너도 나와 같은 느낌의 슬픔 하나는 가슴속에 공유하고 있는 거

니까. 스파게티 다 먹을 즈음에 겨우 하나 찾았구나. 공통점.

'아저씨 이름 뭐예요? 내 이름은 아까 명찰로 봤죠?

응. 손시연이잖아. 너 아까 내가 명찰 보고 있는 건지 알았구나? 나 혼자 괜히 변태로 몰린 것처럼 오버

한 거였네.

'나 최성민'

'휴대폰 이름 바꿔서 저장해야겠다. 이름 몰라서 '이상한 아저씨'로 저장해 놨는데.'

이.... 이상한 아저씨?! 이 자식이 사람을 가지고 노네. 근데 이거 어쩌나. 내 폰에 너는 '진상녀'

라고 등록돼 있는데? 이상한 아저씨와 진상녀와의 만남? 진짜 그림 안 나온다. 그치?

나 역시 이름을 바꿔 저장하려는데, 휴대폰이 없다.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방 속에다 넣어뒀다 보

다. 가방을 뒤적거리는데 여고생이 뭔가 발견한 듯 말한다.

'어?! 유리알 유희네? 나 그거 읽고 독후감 써서 내라고 선생님이 그랬는데.'

너네도 이거 독후감 쓰니? 또 하나 공통점 있네. 나도 연대에서 이거 독후감 쓰라고 해서 썼었거든.

헤르만 헤세. 이름만 생각해도 너무 복잡하다 지금.

'그거 나 빌려줘요. 아싸 책값 벌었다.'

공짜 엄청 좋아하는 거 같아 너 밥 먹으러 따라온 목적부터가 그렇지? 이제 책까지 공짜로 빌려 가려고?

'이거 그냥 줄게. 너 가져.'

'오~쿨한 척. 빌려 갔다가 나중에 시간 남으면 돌려 줄게요. 고마워요. 땡큐.'

책을 책가방에 집어넣으면서 우리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빗줄기는 많이 약해졌다. 나 혼자 다니면 

그냥 우산 안 쓰고 다닐 텐데. 얘 때문에 안 쓸 수도 없고. 그냥 씌워주기로 한다. 조금 걷다 보니 벌써 3번

출구 앞이다.

'야, 너 지하철역에서 집 가까워? 많이 걸어가야 돼?'

'성수에서 내려서 한 15분쯤? 왜요?'

'그럼 너 이거 가져가서 쓰고 가. 3천 원 주고 산 거니까 그냥 가져. 난 여기서 5분이면 가니까.'

'안 그래도 되는데. 괜찮은데..'

나는 우산을 그 여고생 손에 쥐여주고 지하철로 보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남자의 이런 호의에는 별

로 익숙치 않은 거 같다.

'그럼 갈게요. 잘 가요.'

이번에는 인사도 없이 휙 지나가지는 않는군. 나는 아주 조금씩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하숙집으로 걸어간

다. 비 오는 날이 꼭 짜증 나고 우울하지만은 않구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다

#6. 같은 생각

'이제 답안 작성 다하신 분들은 조용히 나가셔도 됩니다.'

조교의 말이 끝나자마자 몇몇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 밖으로 나간다. 나는 잠시 갈등하다가

가방을 챙겼다. 한번 더 검토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서 빨리 시험에서 해방되고 싶은 생각이

나를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시험이 끝났으니. 이제 방학이다. 몸도 무겁고 머리도 무겁다. 상쾌하게 땀을 흘리고 싶다. 나는 곧바로

이글 피트니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와 그 여고생의 만남은 그때 3번 출구 앞에서 끝난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라이터라는 매개물이 우

리를 이어주었지만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이어줄 매개가 없었다. 되돌아보면 손시연이 빌려 간 유리알 유희

라는 책을 통해서 다시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 만남의 가능성마저도 일주일 전

그 애가 보낸 문자 한 통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윽.. 미안해요ㅠ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유리알 유희 잃어버렸어요. 어떡하죠?]

당시 뭐라고 다문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기말고사와 여러 가지 과제에 밤새 시달리는

라 여고생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음에 틀림없다. 그 책 너한테 준거니까 괜찮아. 나 지금 뭐 하는 중

이냐고? 응 시험기간이라 완전히 쩔어있어. 너희도 곧 기말 고사지? 아마도 이런 식의 성의 없는 답문을

하다가 그만두었겠지,

시간이라는 것은 참 무섭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기억 속에서 손시연이라는 여고생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아져만 갔다. 갑자기 신선하게 다가왔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신기루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 애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여고생이 나한테 가져다준 인상이나 느낌

은 강렬했다. 하지만 그 느낌이라는 것이 반드시 가슴 뛰는 애정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나는 손시연을

생각했었지만, 사랑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 이것이 만들어낸 간극은 생각보다 컸다. 나는 한 명의 평범한 대학생

으로, 그 애는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이라는 위치로 되돌아가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한 삶의

테두리를 바꿔놓을 새로운 해프닝은 아마도 발생하기 힘들겠지, 인생은 영화가 아니니까.

한가지 확실한 건 있다. 적어도 나란 놈에게는 여고생과 나 사이의 울타리와 벽을 넘어설 용기가 없었

다.

헬스를 마치고 땀에 젖어 탈의실 문을 여는데, 한 통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어이 최성민! 잘 지내지? 이번에 연대 갔다며? 축하한다. 자식ㅋㅋ 이번 주 토요일에 강남에서 동창회

한다. 뭉치자!]

김창수, 오랜만이네. 그렇게 경쟁의식을 느꼈던 녀석인데 오래간만에 네 이름을 보니까 정말 반갑다. 친구

란 게 이런 건가 봐.

고3 때 네가 반장, 내가 부반장이었지. 너는 1등, 나는 만년 2등이었고. 넌 내가 480점을 맞든, 490점을

맞든 그보다 꼭 몇 점씩은 나보다 점수가 높았어. 운 좋게 내가 시험 점수가 높아도 나만 혼자 가슴 뛰어

을뿐, 너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야.

고등학교 때 음악실에서 틀어준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슬프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나는 영화를 보

는 내내 살리에르를 마음속으로 응원했어. 충분히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서도 모차르트에 대한 콤플렉

스로 불운했던 그의 모습이 안타까웠었거든.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너보다 나은 게 한가지 있기는 했네

여자친구. 강소영 말이야 그건 너도 항상 부러워했었잖아.

나는 그제야 한 통의 문자가 더 와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마터면 못 보고 지나갈뻔했다.

[시험 잘 봤어요~? 아저씨?]

의외로 서로를 가로막고 있던 벽을 넘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쪽은 내가 아니라 손시연이었다. 시험 끝나

니까 이제 여유가 좀 생기는 거 같다. 미안, 나 완전히 이기적인 동물인가 봐. 

[오늘 끝났어. 넌 시험 잘 봤어?]

[왕짜증 ㅠ 시험 얘긴 그만 ㅎ 우리 학교 놀러 와요. 시험 끝난 기념으로 내가 쏠게요]

야, 문자 칼같이 오는 건 마음에 든다. 소개팅할 때 만난 여자애들이 일부러 답문 늦게 보낼 때마다 정

이 뚝뚝 떨어졌거든. 이런 식으로 밖에 자기 가치를 표현 못할까? 이런 생각 때문에 싫어졌어. 내가 너

무 꽉 막힌 걸까? 주위 여자애들은 나보고 연애 하수래. 하드웨어는 어느 정도 되는데 어중간한 나쁜 남

자 콘셉트에, 여자 마음도 모를뿐더러 센스도 부족하다나? 근데 어떡하니. 싸이월드에 퍼가는 연애 지식

같은 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걸.

가만, 네가 쏜다고? 공짜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네. 내가 여고생한테 밥까지 얻어먹을 정도로

불쌍해 보이나 봐. 솔직히 지금 개운하기는 한데, 완전히 피곤해. 드러누워 자고 싶다고. 그래도 네가 사는

밥 한번 먹고 싶기는 하구나.

나는 연대 앞에서 S 고등학교 근처로 가는 버스를 탔다. 6시까지 오라고 했지? 근데 왜 이렇게 버스가

느리게 가느냐. 아무래도 또 늦을 거 같네.

[야 한 십분 늦을 거 같은데. 어디로 갈까?]

[교문 앞으로 오삼~!]

역시 고등학생. 하삼체 같은 거 나 별로거든? 아 너 보인다. 근데 왜 이렇게 손을 흔들어대? 완전히 뻘쭘해.

이렇게 고등학생 많은 거 처음 본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

'어이~! 연대 아저씨! 여기!'

제발 그런 하이톤으로 화물연대 노동자 아저씨 부르듯이 나 좀 부르지 마.

'아저씨'라는 말에 그 학교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이 깜짝 놀라며 손시연과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당연

하지, 자기 학교 여학생이 삼촌도 아니고 오빠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고 '아저씨'를 부르는데 너 같으면

안 놀라겠냐?

손시연의 친구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나를 쳐다보고 킥킥 거리며 지나간다. 쪽팔린다. 여기 있으면 안

되겠어. 너 나 놀려먹으려고 이러는 거지 지금? 나 생각보다 소심한 놈이라고.

'와 되게 오랜만이다. 아저씨. 왜 도망쳐요? 나랑 있는 게 부끄러워요?'

정말 놀리는 말투다. 너네 홈그라운드라 이거지? 여길 오는 게 아니었어. 집 가서 잠이나 자는 건데.

'빨리 쏘기나 해.'

'알았어요. 따라와요.'

얘 뭐 기분 좋은 일 있었나? 완전 기분이 업 돼있네.

'어머. 시연아 뭐 해? 옆에 누구? 아..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이게 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이냐. 내가 왜 네 친구들한테 고개 숙여서 경어체로 인사하고 있느냐고.

너랑 좀 떨어져서 걸어가야겠다. 앞서가 뒤따라 갈 테니까.

손시연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학교 근처에 있는 허름한 분식집이었다. 그래... 기대한 내가 바보지. 하

기야,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냐. 그냥 고맙게 먹을게.

'아저씨, 여기 라볶이 맛있어요. 그때 아저씨가 사준 거보다 훨씬.'

2500원짜리 하나 시켜주면서 생색은... 그래도 오늘 만남으로 파스타 투웰브랑, 분식집의 간극

만큼 우리 거리가 줄어든 거 같아. 그때 파스타 투웰브에서 마주 앉았을 때는 정말 어색했었는데, 지금은 

별로 안 어색해.

'와 아저씨 이제 보니까 진짜 진상이다. 완전 쩔었네. 연대생들은 다 공부 열심히 하나 봐요?'

헉, 밥 사주려면 좀 곱게 사주면 안 되느냐? 오랜만에 봐서 밥 먹는 상대방한테 진상이라는 소리를 꼭 해야

갰어? 그리고 진상은 내가 아니라 너거든? 옛날에 내 폰에 너 '진상녀'로 등록돼 있던 거 모르지?

내가 공짜로 사줄 때는 고분고분 잘 먹더니. 자기가 사준다고 아주 기고 만장하다.

'그래 나 진상이다. 됐지? 목소리 좀 낮추지?'

'미안, 장난이에요. 장난, 진짜 빨리 나왔다. 아저씨 맛있게 먹어요.'

저녁 대용으로 먹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럭저럭 맛은 있다. 사실, 라볶이 맛보다도 생각

보다 이 여고생과의 만남이 부담 없고 편해서 놀라고 있는 중이다. 나는 솔직히 떨어져 있으면서 너랑

나 사이에 존재하는 벽을 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는 아니었나 보네 부끄러워진다. 갑자기

나는 주변 환경을 핑계 대면서 너랑 나 사이에 벽을 만들고 있던 건지도 몰라

'야 근처에 배스킨라빈스 있어? 아이스크림은 내가 사줄게.'

'배스킨라빈스는 없고, 아파트 단지 쪽에 하겐다즈 있어요.'

이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네. 하겐다즈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고, 우리 둘은 지하철역으로 걸어

갔다.

'어, 키 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안 크네 아저씨? 호빗까진 아니지만.'

자, 이제 진상에 이어서 호빗까지 나왔어. 너 오늘 대놓고 막 나가는 거 같아.

'야 나 그래도 177이거든? 너야말로 겨우 내 어깨 넘어오면서 무슨.'

'난 여자잖아요. 남자가 조인성 정도는 커야지. 정말 멋있잖아요. 조인성. 난 180은 넘는 남자랑 사귀어

야지. 대학 가면.'

그래 희망사항이라는데 누가 말리겠냐. 조인성 멋있지. 근데 나도 김태희 좋아하거든? 너 한번 김태희

랑 비교 당해볼래? 감수성 예민한 여고생 가슴에 상처 줄까 봐 내가 참는다.

어느새 주변이 어둑어둑해진다. 나는 성수역 집 근처까지 손시연을 바래다줬다.

'야 오늘 잘 먹었다. 잘 들어가.'

'네. 다음번엔 아저씨가 사줘요. 저 갈게요.'

집으로 돌아오는 덜컹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계속 손시연이 생각났다. 소개팅을 여러 번 했지만, 이

렇게 재밌고 편하게 여자를 만난 적은 없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묘할까? 너무 편하고 기분이 좋다. 장

난으로 갈굼 당하는 것도 기분 나쁘지 않고, 약간 어설프게 만나서 대화하는 것도 좋다.

손시연,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일까?

#7. 어느 날 사랑이

이상한 일이다. 왜 내 머릿속에서 그 여고생 생각이 자꾸 나는 거지? 이런 느낌은 정말이지 처음이다.

고등학교 때 강소영을 사귈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던 거 같기도 하다. 아니야. 소영이랑은 학교에서 매일

붙어 있어서 그런지 잠시 떨어져 있다고 해서 보고 싶다고나 그러지는 않았어. 그런데 나는 지금 너무

보고 싶다. 너를.

아침에 일어났는데 제일 먼저 너에 대한 느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머리 감으려고 눈을 감아도 마

찬 가지다. 토익학원에서도, 헬스장에서도, 하숙집에서 TV를 켰을 때도, 컴퓨터를 할 때도 잠깐씩 네 생

각이 나. 그런데 이게 어떤 감정인지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어. 편한 친구 그 이상의 감정인 건 확실해.

하지만 이게 사랑인지는 확신이 안 서네. 고등학교 때는 강소영이랑 결혼하고 평생같이 살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 애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열정적으로 좋아하고 행복했지.

그렇지만 솔직히 너에 대한 감정이 불타는 사랑 뭐 이런 건지는 잘 모르겠어. 그냥 그 자체로 편하고

보고 싶기는 한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

무려 4살 차이인가? 아니 3살 차이지! 너는 빠른 90이니까. 그나마 다행이네. 근데 나 지금 뭐하고 있는

거니? 왜 인터넷 검색창에다 '대학생 여고생' 을 검색하고 있는 거야? 저기 지식인에 누가 써놨네.

'대학생인데 여고생이랑 사귀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쳐다볼까요?ㅠㅠ'

저런 걸 물어볼 때가 없어서 지식인에다 물어보는 녀석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들일까. 값싼 위안이

라도 받으려는 건가. 근데 나도 별반 다를 게 없는 놈이네. 여기서 이런 거나 검색하고 있고. 아직 사랑하

는 감정인지 조차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와. 정말 복잡하다.

친구들아! 자, 이리 와봐. 내 여자친구 소개해줄게. 여고생이야! 2학년. 예쁘지?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친구 놈들은 분명 놀라서 이렇게 말하겠지.

'이런 미친놈, 완전히 순진한 어린애 꼬드겨서 뭐 하는 짓이야!'

그만. 이런 복잡한 생각 그냥 집어치우자. 그냥 나 자신에게 내 감정에 충실하자. 그러고 보니 내가 먼

저 문자 보낸 적이 한 번도 없네. 내가 늘 이런 식이니까 여자애들로부터 센스 없다는 소리 나 듣는 거겠지.

[뭐 하고 있어~?]

[수업 중이요~^^ 완전 선생님 몰래 문자 쓰고 있음. 왜요? 아저씨?]

아, 수업 중이구나. 센스란 게 이런 건데. 수업 중인 거 미리 알고 여자애 좀 배려해주면 좀 좋을까?.

[그냥 심심해서ㅋ 학교 끝나고 신촌 놀러 와. 이번엔 내가 쏠 차례잖아.]

[어. 오늘은 안되는데ㅜ 내일 놀러 갈게요 밥사줘요ㅋㅋ]

[그래~그럼 내일 내가 또 연락할게. 수업 집중해! ㅋ]

별것도 아닌데 허탈하다. 그냥 오늘 못 보고 내일 보는 것뿐인데 뭐가 이렇게 아쉬울까. 다행히 얘도

나랑 만나는 게 어색하거나 부담되거나 하지는 않나 보다. 심심해도 할 수 없지 뭐. 그냥 집에서 빈둥 거

리기나 해야겠다.

밤 10시쯤 됐는데, 고등학교 때 정말 친했던 친구 민석이로부터 연락이 온다 맥주 사서 하숙집으로 오고

있는 중이란다. 지금 서강대에 다니는데 쾌활하고 장난기 많은 정말 재미있는 녀석이다. 마침 심심했는

데 잘 됐다. 이 녀석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같은 과 후배 여자애에게 완전히 푹 빠져있었다,

'나 2주일 내로 걔한테 눈 딱 감고 질러버리려고. 아, 완전 내 스타일이야. 몸매 하며 얼굴 하며 아주... 죽

는다 죽어.'

'잘해봐 인마. 괜히 차이고 나서 나한테 술 사 달라고 하지 말고.'

맥주 마시고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얘기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12시다. 갑자기 민석이가 내

컴퓨터 앞에 앉더니 이것저것 뒤져본다.

'오 치밀한데 이 자식? 야동 어디다 숨겨놨어? 빨리 자수하지?'

'나 재수하면서 야동 끊었거든? 이미 고등학교 졸업할 때 같이 졸업했으니까 헛수고하지 마.'

'그래? 그럼 내가 오랜만에 새로운 거 하나 소개해 주마.'

저 녀석 장난기는 진짜 알아줘야 돼. 어? 근데 너 지금 뭘 다운로드하는 거냐. 그래 말리기도 귀찮다.

'제발 너 혼자 곱게 감상하고 지워라. 응?'

민석이가 다운로드한 성인 동영상 제목을 본다. 여고생을 어쩌니 저쩌네 하는 원색적인 제목이 쓰여 있

다. 잠깐, 이건 아니잖아.

'잠깐 스톱!'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외치면서 민석이에게서 마우스를 낚아채 영상을 지워버렸다. 갑자기 혼자 열

받는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반사적인 거부감이 든다. 하필 여고생이 들어가는 제목의 영

상이냐고 제발 그런 영상 좀 다운로드해 보지 마. 완전 기분 찜찜하다고.

'아씨, 이딴 거 좀 다운로드하지 말라고! 여고생이면 애들인데 좀 순수하게 바라보면 안 되냐? 응?'

완전 내 감정 이입시켜서 한풀이라도 하듯이 나는 민석이를 몰아세웠다. 그런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

는지 민석이가 웃으며 응수한다.

'뭐야, 정말 웃기네. 네가 보고 지우라메. 갑자기 왜 이렇게 흥분해? 이 자식 이거.'

'아까 했던 말 취소. 다운로드하는 거 절대 금지다. 인마.'

나는 민석이를 반강제로 컴퓨터 앞에서 끌어내리고 좀 더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1시쯤 되자

민석이도 그만 일어나려는지 맥주 캔이랑 아주 부스러기를 치운다.

'야 내일모레, 토요일 동창회 하는 거 알지? 너 재수하느라고 그동안 못 나왔었잖아. 너보고 싶다는 

애들 많더라. 이번에 꼭 나와.'

'응. 알았다. 잘 가라.'

나는 민석이를 보내고 하숙집 침대에 드러눕는다. 내 방 주변을 둘러본다. 내 하숙집이 왜 이렇게 산뜻

하게 느껴지지? 다시 그 애 얼굴이 떠오른다. 기분이 좋아진다. 상쾌하다.

나는 내일 손시연을 만난다.

'어? 너 왜 사복 입었어? 교복은 어쩌고?'

다시 만난 손시연은 사복 차림이었다. 교복을 안 입으니까 그래도 정말 어린 여고생처럼 보이지는 않는

다. 같이 돌아다닐 때 부담스럽니는 않겠네. 다시 만나니까 좋다.

'저라고 맨날 교복만 입는 줄 알아요? 평소에 사복 많이 입거든요?'

'너 학교 끝나고 바로 오는 거잖아?'

'아저씨 되게 궁금한 거 많네 정말. 그냥 사복 입고 왔으면 그러려니 하면 안 돼요? 오늘 뭐 사줄 거예요?'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딱히 뭐...'

'그럼 내가 가는 대로 따라와.'

여자애들이 유일하게 내 강점으로 뽑는 거. 여자랑 만날 때 잘 리드하고 끌고 다니고 하는 거지. 그래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지. 먹고 싶은 거 먹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나면 되는 거잖아? 이렇게 부담 없이 편

하고 좋은데.

롤집에서 롤을 먹으면서 이것저것 대화를 하다가, 영화 얘기가 나왔다. 그래, 영화 안 좋아하는 사람

은 별로 없지. 너도 좋아하는구나, 영화?

'야 그럼 이거 먹고 영화 보자, 요즘에 재밌는 거 하나?'

'저도 요즘에 뭐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학교만 다니다 보니까. 공포영화만 아니면 돼요. 저 무서운 거

절대로 못 봄.'

때마침 6월 말이라 공포영화 시즌일 텐데, 너 성격만 보면 공포 영화 무지 잘 볼 거 같은데 의외로

무서운 거 싫어하는구나. 나는 손시연을 데리고 아트레온으로 갔다. 요즘 무슨 영화하지? 와 근데 진짜

볼 거 없다. 게다가 너 공포영화 못 보니까 그것도 제외해야 되고 슈퍼맨 리턴즈 괜찮겠네. 헐, 근데 상

영시 간이 2시간 반을 넘어. 저것도 제외.

'오, 조인성 나오는 영화한다! 저거 봐요! 어.. 근데 18세 이상 관람이다....'

아 맞다. 네 나이도 생각해야지. 18세 이상 관람가도 못 보네. 그럼 대체 뭘 봐야 되냐 우리?

'너 진짜 꼬꼬마다. 18세 이상도 못 보고, 공포영화도 못 보고. 너 10시 전까지는 집에 들어가야 한다며?

그럼 시간 안 맞는 거는 또 못 보네? 어디 만화영화하는데 없나?'

되돌아보면, 손시연은 어리다는 말에 언제나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 짜증나 진짜. 왜 아저씨는 말끝마다 어린애 아니면 꼬꼬마 걸려요? 나 사복 입어서 18세 영화 볼 수

있을 거 같거든요? 그냥 비열한 거리 봐요.'

이러다가 얘 삐지겠다. 그래 장난 그만할게. 그래도 18세 이상은 안돼. 조인성 나와서 이러는 거 아니

니깐 오해는 말어. 결국 우리가 선택한 영화는 엑스맨이었다. 고등학생이랑 영화 보려니까 진짜 고려해

야 될 게 많다는 걸 느낀다.

'팝콘이랑 음료수는 내가 쏠게요. 러브 콤보 면 되겠다. 러브 콤보 괜찮죠? 러브 콤보 사 올게요.'

얘가 진짜... 왜 이렇게 '러브러브' 거려? 나 원래 영화 볼 때 뭐 안 먹는데. 그래도 괜찮다. 같이 영화 보니

까 재밌네. '여자' 랑 영화 보는 거도 오래간 만인 거 같아. 아, 아니다. 소개팅 한 여자애랑 얼마 전에 영화 

보기는 했었지. 근데 나는 그날 이후로 그 여자애한테 연락을 안 했어. 그러니까 얼마 뒤에 소개해 준

애 통해서 왜 연락 안 하느냐고 떠보듯이 물어보더라고. 간단했어. 너무 거리감 느껴지고 불편했거든.

솔직히 영화 내용은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느새 영화가 끝나고 지하철로 걸어가는데 손시연이 말을

꺼냈다.

'아저씨 나 종로에 있는 단과학원 등록했어요. 주말에 다녀요.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서 완전 왕따처럼

주변에서 혼자 밥 먹어야 될 듯.'

'오. 공부 좀 열심히 하려나 본데?'

'당연하죠. 내가 수학이 좀 안되거든요. 수학만 잘하면 10등 정도 할 수 있는데 진짜. 수학 때문에 완전

미치겠어요. 요즘.'

'열심히 해. 수학은 시간 많이 투자하면 점수 올라. 학원 다니면 점수 많이 오를걸?'

지금만 해도 안 그러는데, 나는 그때 왜 그렇게 눈치가 없었을까? 그 애가 그 정도 말했으면 내가 알아서

주말에 학원 근처에서 밥 사준다거나, 밥 먹으면서 수학 가르쳐 준다거나 할 수 있어야 했다.

결국 다시 이야기를 꺼낸 건 손시연이었다.

'주말에 학원 근처에서 혼자 밥 먹기 진짜 싫다. 아저씨, 언제 근처에서 한번 더 밥 사주세요.'

'아. 알았어 학원 몇 시에 끝나는데?'

'토요일은 저녁 7시에 끝나고, 일요일은 1시에 끝나요.'

'나 토요일 고등학교 동창회라 술 많이 마실 거 같아서... 일요일은 힘들 거 같아 토요일 저녁에 사

줄게. 너 사주고 바로 동창회 가면 되겠다.'

나는 그렇게 한번 더 사주기로 약속했다. 우리의 첫 만남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앞의

로 너를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게 좋다. 행복하다.

사랑은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posted by 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