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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과거라는 이름
그날 손시연과 헤어질 때쯤 도착했던 문자는 손시연이 보낸 게 아니었다. 그러면 그렇지, 문자는 다름
아님 동창 하얀이로부터였다. 아 맞다. 하얀이랑 만나기로 했었지. 맨날 손시연이랑 붙어 다니다 보니
까 잊고 있었네. 하얀이랑 약속 잡은지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난 거 같은데. 아무리 친구라지만 여자애 한
테 두 번이나 먼저 연락 오게 만들다니. 최성민, 너 정말 비매너야.
결국 나는 하얀이와 홍대 근처에서 오늘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던 것이다. 신촌에 사는 민석이도 같이
보기로 했다.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민석이가 우리 하숙집으로 찾아왔다.
'야, 너 혼자 어떻게 들어왔어?'
'너네 하숙집 비밀번호 정도는 이미 다 꽤고 있거든? 내가 여기 출입한지도 벌써 몇 개월인데.'
민석이는 자기 집인 양 내 침대에 뒤로 털썩 눕다가 곧바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얼굴 한가득 특유의
부담스러운 미소를 띠면서 나에게 말한다.
'나 성공했다.'
성공? 어떤 성공을 했다는 거야. 자세히 좀 말하지?
'뭘 그렇게 멀뚱멀뚱 쳐다만 봐. 나 전에 후배 여자애 사귀기로 했다고, 이 형님이 나보다 키 크고 자생
긴 3명의 경쟁자를 무찌르고 고백에 성공했단 말이다.'
아, 맞다. 너 같은 반 후배한테 지른다고 몇 주 전부터 벼르고 있었지. 자식. 축하한다.
'너 보기보단 연애스킬이 좀 있나 보다? 여자친구한테 잘해줘 인마. 괜히 밀고 당기기 하거나 방심하지 말
고. 너 사귀기 시작한 첫 며칠 동안이 제일 위험한 거 알지?'
'안다 인마. 이제 나도 고생 끝 행복 시작이구나.'
나도 안다 그 기분. 자식, 진짜 좋긴 좋나 보구나. 얼마 전만 해도 그 여자애 가슴이 어떠니 몸매가 어떠
네 시답지 않은 소리만 해대더니, 이제는 자기 여자친구 됐다고 그런 말도 자제하네. 그래 다 그런 거지
뭐. 네가 악의가 있어서 그런 소리를 했겠냐. 다 욕구불만의 표출이었겠지.
'고백은 어떻게 했는데?'
'응? 아 고백? 형님이 피아노 좀 치잖냐. 피아노 바 가서 칵테일 마시다가 피아노 쳐주고 고백했지. 역
시 여자는 분위기야. 바로 넘어오더라고. 솔직히 완전 무드 있지 않았겠냐? 안 그래?'
하기야, 너 외모랑은 안 어울리게 피아노 하나는 끝내주게 잘 치지. 나도 어렸을 때 피아노나 배워놓을 걸
그랬나. 다룰 수 있는 악기가 리코더 뭐 이딴 거 뿐이니 원.
'야 최성민. 근데 너는 뭐 좋은 소식 없어? 너도 소영이랑 깨진지 거의 2년이 다 돼가는 마당에. 너 아예
소영이랑 다시 사귀지 그러냐? 걔 1학년 때 사귀던 남자친구랑 깨진 뒤로 솔로라던데.'
또 강소영.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다.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저 이름이. 과거의 기억이
'소영이 얘기 좀 그만하지. 야 안 그래도 나 너한테 말할 거 있어.'
그래, 이제 숨길 필요 없지. 제일 친한 놈한테 우선 말해보자. 당당하게 소문내고 다니자고 이제.
'사실 나도 최근에 여자 만나고 있어.'
민석이는 놀라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손을 덥석 잡는다.
'오, 진짜? 이 자식 드디어 암울한 인생에서 좀 벗어나겠구먼. 누구냐? 예뻐? 사진 좀 보자.'
나는 전에 찍은 스티커 사진을 보여준다. 민석이가 그걸 뚫어져라 쳐다본다.
'오우, 예쁘장한데? 근데 몸매 나온 사진은 없냐? 내 기준은 얼굴이 아니라 몸맨데.'
'이 자식이, 남의 여자친구 가지고 몸매라니. 몇 살로 보이냐?'
'사진으로만 봐서는 되게 싱싱해 보이는데? 신입생이냐?'
저 녀석 사람이 무슨 야채도 아니고 싱싱하다고? 표현하고는. 하기야 나는 얘한테 잡식동물이라고 놀
리는 마당인데 뭘.
'나랑 세 살 차이야 고등학생 빠른 90년생.'
그 말을 듣자마자 민석이는 오버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두 팔을 뻗어 보인다.
'90년생! 이 자식 얌전한 놈인 줄 알았는데 완전히 능구렁이구만. 축하한다 어떻게 꼬셨냐 과외하다가
꼬신 거야?'
근데 이 녀석이 축하하는 의도가 불순해 보이는 건 왜 일까?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네. 고등학생이라
는 말 듣고도 비난하지 않고 축하해주는 걸 보니. 나 혼자 괜한 걱정한 건지도 몰라.
'꼬시고 뭐 그런 거 아니야 인마. 우리 진짜 나름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고.'
'그래그래. 뭐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냐. 걔 대학 갈 때까지 속 썩이지 말고 이대로만 무럭무럭 잘 자라
게 해줘라 어떻게 만난 거야?'
어떻게 만났냐고? 그러고 보니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나랑 손시연의 첫 만남. 말로는 잘 설명이 안될 거
같아. 우연인 거 같기도 하고, 필연인 거 같기도 해. 악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손시연이 라이터
내놓으라고 울고불고 할 때만 해도 정말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어. 그래 우연
이 아니라 필연이었는지도 몰라. 손시연이 하필 우리 하숙집 앞에서 그 시간에 담배 피우려고 한 거. 내가
하필 지갑을 놓고 와서 하숙집에 들러야 했던 거. 그냥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좀 딱딱 맞아 떨어지
지 않니?
'뭐야 이 자식 왜 혼자 헤벌쭉 하고 있어? 정신 차려 인마 자세한 건 나중에 듣고, 나가자 하얀이 기
다리겠다.'
홍대는 신촌과 가까우면서도 매우 다른 분위기가 난다. 뭔가 예술의 냄새가 좀 더 짙다고나 할까. 패션
도 미묘하게 차이가 나고. 가게 인테리어나 길거리도 신촌과는 다른 느낌이 난다. 신촌에서만 지내다
보면 이런 홍대의 분위기가 가끔 어색할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자유분방한 향기가 나는 홍대
에서 피할 수 없는 매력을 느낀다.
'오 최성민, 구민석! 오랜만이다. 얼굴 보기 힘든 녀석들.'
하얀이가 홍대 정문 앞에서 우리를 발견하고는 반가워한다.
'전에 동창회 때 봤잖냐. 얼마나 오랜만이라고. 야 우리 뭐 먹을까?'
'아무거나 먹자. 아무거나.'
아무거 나라... 민석이가 시계를 쳐다보더니 우리를 멈춰세우고 한가지 제안을 한다.
'시간도 8시 넘었고, 배고프지? 나 아는 곱창집 있는데 갈래? 하얀아 너 곱창 같은 거 먹을 수 있냐?'
하얀이가 별 걱정을 다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민석이를 잡아끈다.
'너네보다 곱창, 순대 이런 거 훨씬 잘 먹거든? 걱정 말고 앞장서 구민석.'
우리는 민석이가 이끄는 데로 홍대의 어느 투박한 곱창집에 자리를 잡았다. 겉보기에는 허름한데 꽤나
많은 손님들로 가득 차있다. 백열등으로 밝히는 희미한 불빛에 고기 굽는 연기가 스치고 지나간다.
'자. 곱창 먹는데 사이다만 먹을 수는 없지? 이모, 여기 참이슬 한 병요!'
하얀이는 여자인데도 정말 씩씩하다. 그래서 남녀 가릴 것 없이 주변에 친구가 많다. 그러고 보니까 하얀
이, 소영이랑 둘이서 제일 친했었는데. 고등학교 때 내가 너를 통해서 캐물었잖아. 소영이가 뭐 좋아 하
는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지금 나한테 삐져있는 건지.
'야, 생각해보니까 내 앞에 있는 남자애들 둘 다 대학 잘 갔네. 한 명은 연세대, 한 명은 서강대. 나중에 성
공하면 나 좀 잊지 말고 챙겨줘야 돼 알았지?'
성공은 무슨, 아직 우리 학교 안에서 공부하고 학점 따고 인간관계 맺어가기도 힘겨운데 아직 멀었어.
좀 더 노력해야지. 김창수 같은 녀석이 무조건 성공할 스타일이지. 벌써부터 서울대 내에서도 학점에서
톱을 달리고 있잖아 그 빡세다는 대학생 기자 활동을 같이 하면서도 말이야. 학점이든. 학내 활동이든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는데 그런 녀석이 대단한 거지.
'넌 어디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거야?'
'응 아는 교수님 통해서 홍대에 있는 의류 디자인 업체에서 디자인 공부 뭐 이런 거 하고 있어. 솔직히
들어오는 돈은 별로 없는데.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지 뭐.'
고등학교 때 예체능계열이던 하얀이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은 서울산업대 미대에
다니고 있다. 내가 알아봤어 너 중학교 때부터 나랑 같은 학교였잖아. 교복 수선해서 입는 거 하며... 미
적 감각이 남달랐다고. 물론 선생님들한테 걸리면 왕창 혼났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벌써 곱창도 다 먹고 술도 한 병 다 마셨다. 우리는 2차 격으로 근처에 있
는 바로 갔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앉아서 술을 마실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의 바다. 바에 온 것도 오랜
만이다. 손시연은 아직 꼬꼬마라서 같이 술을 마시거나 바에 올 수는 없다. 이런데 오려면 아직 1년 정
도는 기다려야 한다. 물론 본인은 술을 마실 수는 있다고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 여명 808
을 캔커피로 착각했던 걸로 봐서 거의 마신 경험이 없는 거 같다. 하기야, 담배도 어떻게 피우는지 몰라
서 쩔쩔매고 있었으니.
바에서 칵테일을 시켜서 마시고 있는데 민석이한테 전화가 온다. 민석이는 전화를 받더니 매우 저자세
로 굽신굽신 거린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응. 당연히 가야지. 잠깐만 기다려. 알았지? 오빠가 빨리 갈게.'
뭐야 저 자식 아주 사모님 하나 모시고 있구나. 자기가 엄청 주도하는척하더니 여자친구한테 쩔쩔매
고 있네. 그래 자기 여자친구한테 함부로 대하는 놈들보다야 네가 훨씬 낫다. 하얀이가 그런 민석이를
재밌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야 구민석. 아까 말했던 네 여자친구지? 와~ 너 정말 잡혀사는구나?'
'아니야. 내가 좀 잘못해 논게 있어서 며칠간은 저자세로 나와야 돼. 나 먼저 간다. 또 연락
할게.'
민석이는 허겁지겁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간다. 사귄 지 며칠이나 됐다고, 뭘 얼마나 잘못했길래. 나랑
하얀이는 그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웃는다. 하얀이가 땅콩을 하나 집어먹다가 내 잔을 보더니 묻는다.
'야 너 칵테일 하나 더 시켜줘?'
'됐어. 좀 쉬다 마셔야겠어.'
그때 내 휴대폰도 진동하기 시작한다. 손시연이 보낸 문자다.
[오늘 데려다주지도 않고! 정말 어두운데 외롭게 혼자 갔음ㅡ.ㅡ 나 버리고 친구들이랑 잘 놀고 있어요?]
미안. 하얀이랑 민석이가 지금 밖에 시간이 안돼서 어쩔 수 없었어. 그래서 미리 연락했었잖아. 하루 정
도는 좀 봐주라.
답장하는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하얀이가 말한다.
'너 문자 하면서 진짜 실실거리는 거 알아? 너도 여자친구 사귀냐?'
표정관리 좀 해야 되는데, 잘 안되네. 근데 너한테 여자친구 사귄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널 못 믿는 건 아니
지만 네가 알게 되면 곧바로 소영이도 알게 될 거 아니야. 잠깐, 나 지금 왜 강소영을 신경 쓰고 있는 거지?
이제는 신경 쓸 필요 없는 건데.
'최성민, 나 너한테 아까부터 할 말 있었는데. 소영이 얘기해도 될까? 괜찮아?'
또 강소영.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어. 난 언제나 다짐했다고. 강소영은 과거의 기억이라고. 과거의
이름이라고. 그런데 너네들은 그걸 자꾸 현재의 이름으로, 현재의 기억으로 가져오려고 해. 내가 그 굴
레에서 벗어나려고 얼마나 발버둥 쳤는 줄 알아? 재수하면서 소영이에게서 벗어나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노력했는지, 매일 밤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하냐고.
'대답 안 하네? 그냥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지? 너 왜 동창회 날 소영이한테 화내고 갔어? 너
가고 나서 소영이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내가 다독거리느라고 거의 한 시간 동안 소영이 옆에서 붙어
있었어. 너 나한테 밥 한번 사야 돼 그것만 생각하면.'
소영이가 울었었어? 그래, 그랬다면 나도 미안해. 울리고 싶다거나 그런 마음은 전혀 없었어. 사실 내
가 너무 힘들어서 얼굴을 마주 보기가 싫었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쏘아붙이고 나온 거야. 뒤도 안돌아
보고 나갔어. 그래서 그렇게 울었는지도 몰랐어.
근데 그거 알아? 왜 내가 울어야 하고 가슴 아파야 할 때에 내가 아닌 소영이가 우는 거지? 내가 이별
통보받을 때도 그렇고 이별하고 나서 처음 동창회에서 봤을 때도 그래. 솔직히 말하자고. 슬퍼해야
할 건 강소영이 아니었어. 바로 나였다고. 내가 강소영을 붙잡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내가 너 때
문에 얼마나 실망하고 힘들었는지 아느냐고 따졌어야 할 상황이었다고. 근데 왜 나를 나쁜 놈으로 만든
는 거야.
'그리고 그거 알아? 창수랑 소영이랑 요즘에 만나는 거. 아직 사귀지는 않지만 내가 보기에는 커플이나
다름없어. 창수 걔는 자기네 학교에서도 충분히 여자애들 사귈 수 있을 텐데. 굳이 멀리 있는 소영이를
찾아와서 만나더라고.'
창수가 나에게 소영이가 좋다고 고백할 때의 그 느낌. 그게 다시금 나를 휘감고 지나간다. 그렇구나... 결
국에 창수랑 소영이랑... 아니야. 내가 심란해할 필요는 없어. 창수는, 김창수는 나한테 말했어. 자기가
소영이 좋아해도 되는 거냐고. 내 얼굴 보고 직접 말했어. 4년 만이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러니까
김창수가 나한테 미안해야 할 필요도 없고 내가 심란해야 할 필요도 없는 거야.
'너랑 만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뭐 지금 이렇게 된 마당에 남녀관계에 끼어서 이러는 꼴도 참
우습기는 하지만, 내가 소영이랑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인 거 알지? 너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
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계속 대답하지 않고 애꿎은 물컵만 자꾸 들이켰다. 휴대폰이 또 한번 울린다. 손시연이다. 나는 바
로 답장을 보냈다. 그런데 답장을 보내는 손길이 내 손길이 아닌 것 같다. 혼란스럽다. 이런 기분
'너 소영이가 말렸는데도 재수한다고 마음 굳혔잖아. 그때 소영이가 맨날 우리 집 찾아와서 울고 하소연
하고 했어. 내가 그때 뭐랬냐구?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나. 이렇게 힘들어할 거면 최성민 잊
고 대학 가서 다른 남자 사귀라고 했었어. 1년이나 걸리는 재수하면서 냉정하게 소영이한테 대했던 네
가 미웠거든.'
내가 미워? 내가 냉정해? 하얀아. 네가 뭘 알아. 내가 재수하면서 소영이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창
수에 대한 경쟁의식 때문에 얼마나 불타올랐었는지. 그런 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어.
'너 재수학원 들어가고 나서 내가 계속 설득했어. 새롭게 시작하라고 소영이도 그 뒤로 너랑 이별하고
대학 가서 새롭게 시작했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자친구도 사귀고. 그 남자도 연대생이었네. 그러고 보
니까.'
'잠깐만.'
나는 하얀이의 말을 끊었다. 복잡하다. 내가 왜 소영이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거지? 난 지금 확실한
게 말할 수 있어. 난 손시연을 좋아해. 내 마음속에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손시연이야. 나
소영이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고 혼란스러워하기 싫어. 그건 손시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손시연은
지금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다른 여자 때문에 혼란스러워한다면 나 정말 나쁜 놈인 거야.
'하얀아. 말하고 싶은 게 뭐야? 나 솔직히 불편해. 소영이 얘기 계속 듣는 거.'
'하고 싶은 말? 그래 해줄게. 소영이 신입생일 때도 술 먹으면 너 얘기하고 했었어. 자기가 제대로 된 선
택을 한 건지 모르겠다고. 네 생각이 아직도 많이 나는데, 다시는 네 얼굴 보고 다가갈 수 없을 거 같다고.
너 연대 간다고 하니까, 소영이 좋아하더라? 그런데 술 많이 먹은 날 나한테 말하더라고. 어차피 첫 수
능 때도 고려대 붙었었는데, 왜 안 간 거냐고, 왜 재수를 했어야 했느냐고.'
이제는 재수해서 연대 온 거까지 네 입을 통해서 강소영한테 한마디 들어야 되는 거야? 서울대는 나랑 인
연이 아니었어. 그래, 수능 때 제 실력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내 실력이지. 내가 부족했던 거야. 어머니도.
혼자 계신데 더 이상 수능을 치를 수는 없었어. 그래서 연대 왔어. 내가 뭘 잘못하기라도 한 거야?
'이야기 다 끝난 거야? 하얀아 미안해. 나 먼저 일어나도 될까? 나중에 다시 보자 우리.'
'너 아까부터 어린애같이 왜 이래! 소영이가 너한테 아직까지 마음 있데. 다시 사귀고 싶데. 됐어? 난 솔
직이 아무리 친구라지만 소영이 이해할 수 없어. 왜 그러는 건지. 왜 아직까지 너 같은 녀석 하나 못 잊고
힘들어하는 건지.'
뭐라고? 나는 일어선 채로 잠시 동안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지금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지? 여자들은 원래 이런 거야? 자기 마음대로 이별 통보하고 자기 마음대로 다시 만나고 싶다고 하고
대학교 다니면서 남자친구 다 사귀고 나서 헤어지니까 그제야 내 생각이 조금 났니? 재수생 신분에
서 벗어나서 번듯한 연대생 되니까 이제 옛 기억이 떠올라?
그럼 나는 뭐가 되는 건데. 그 기간 동안 힘들게 잊으려고 노력하고 가슴 아파했던 나는 뭐가 되는 거냐고.
다시 만나자고? 그런 식으로 다시 내 마음 휘저어 놓지 마. 난 이제 예전이랑 달라. 따로 사랑하는 사람
이 있어. 나는 손시연을 사랑해. 그 마음 이제는 변하지 않을 거야.
'너 연대 오고 나서도 소영이가 계속 나한테 말했어.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자기가 먼저 연락해
도 되는 거냐고. 너한테 연락 온 적 없어? 그건 나도 잘 몰라. 그래도 확실한 건 소영이가 그렇게 말했다는
거야. 창수랑 만나면서도 항상 뭔가 하나 잃어버린듯한 기분으로 지내야 했어. 소영이는.'
'그만하자 하얀아.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는 얘기 같아. 계산 내가 한다. 먼저 일어날게.'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이는 그런 나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너 완전히 자기밖에 모르고 이기적인 거 알아? 소영이가 한번 만나재. 만나서 이야기나 해보재. 제발
연락 씹거나 대화 거부하거나 하지는 마. 그런 거 정말 예의가 아니야. 만나. 싫어도 만나서 싫다고 말해.
얼굴 직접 보고 싫다고 말하고 끝내. 더 이상 소영이 힘들게 하지 마.'
자기 밖에 몰라? 이기적? 소영이를 힘들게 해? 내가 왜 그런 소릴 들어야 되는데. 너 소영이랑 더 친한
친구라고 강소영 편 드는 거야 정에 하얀?
나는 바를 나와서 신촌까지 그대로 걸어갔다. 지하철을 타거나 할 기분이 아니었다. 이렇게 흥분하는
거, 이것도 아직 과거에 얽매여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작은 부분에서부터 벗어나야 한
다. 강소영을 완전히 잊고 싶다. 손시연이 보고 싶다. 목소리를 듣고 싶다. 나도 모르게 손시연에게 전
화를 건다. 들린다 네 목소리.
'아저씨? 정말 밤늦게 웬일이에요? 거실에서 아빠랑 동생이랑 같이 TV 보고 있었단 말이에요.'
손시연이 아빠한테 통화하는 게 들릴까 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응? 그냥... 너 목소리 듣고 싶어서.'
'아저씨 오늘 이상하다. 나한테 말 많다고 말 좀 줄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술 마셨어요?'
'조금. 취할 정도는 아니고. 너 아빠한테 걸릴 거 같으면 말 안 하고 있어도 돼.'
'알았어요. 할 말 있으면 해요.'
그런데 막상 할 말은 없다. 나는 그렇게 계속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서로 아무 말 없는 정적이 계속되자
손시연이 못 참고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보기에 아저씨 지금 되게 취한 거 같거든요? 왜요? 술 취한 김에 나한테 서운했던 거 꼬장 부리고 싶
어요? 잠깐 밖에 나와서 받을까요?'
'아니야 됐어. 그냥 내일 또 전화할게. TV 잘 보고 잘 자.'
나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신촌 하숙집까지 꽤나 먼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가능하면 손시연을 생각
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다시, 편의점에 들러서 담배 하나를 샀다. 딱 2대만 피우고 버리자. 다짐하면서.
#16. 손시연
손시연과 명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주말에 만나지 못했었는데 오랜만에 시간이 나
다. 서둘러 교통카드를 찍고 지하철에 탄다. 에어컨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사람들이 꽉 찬 지하
철 칸의 공기는 답답하다. 심호흡을 하면서, 나는 지하철 손잡이를 꽉 붙잡는다.
어제 소영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의외로 담담하게 전화를 받았다. 아니, 담담하게 전화를 받기 위
해 노력했다.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준비하고 있던, 대비하고 있던 전화였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성민아 안녕..'
'응 안 그래도 내가 먼저 전화하려고 했어. 소영아, 우리 만나자.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맞는 거 같아.
나? 아무 때나 괜찮아, 10시 이후만 아니면. 민들레영토 앞 괜찮지? 그래, 그때 보자.'
나는 되도록이면 전화를 빨리 끝내기 위해 노력했다. 오랫동안 전화기를 들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강
소영과 둘이서 만난다. 정말 오랜만이다. 그런데 나는 그 자리에서 강소영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에게도 깊은 상처를 내면서,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할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만 해야 한다. 아마
도 그게 나와, 나와 강소영이 등장하는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일 것이다. 나는 좋든 싫든 그 마지막 페이지
에 등장해야만 한다.
나는 피했었다. 책의 줄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지만, 사실 마지막 페이지를 완
성해야 한다는 현실이 나를 더 두렵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결말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결말이 두려
워서 마지막 페이지를 읽지 못하는 바보 같은 놈이었다.
[나 CGV 앞이에욤 빨리 와요]
하지만 피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내가 새롭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감동적
인 소설이나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런 생각을 했다. 앞으로 저런 스토리의 영화나 소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이게 마지막이 아닐까.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강소영과 헤어졌을 때, 앞으로는 강소영을 대하던 마음과 열정으로 다
른 여자를 사랑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다른 여자를 만날 때 나는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 했다.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려고 이 여자 저 여자 소개팅도 해보고 만나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나
는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할 줄 알면서도 언제나 이리저리 발버둥 쳤다. 그럴수록 쳇바퀴는 더더욱 빨
리 돌아가 나를 숨 가쁘게 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그렇게 괴로워했다.
손시연은 그런 나에게 다가와 줬다. 쳇바퀴에서 벗어나 편히 숨을 쉴 수 있게 해줬다. 이제 나는 손시연과 끝
나지 않을 이야기를 새롭게 써나가야 한다. 강소영과의 페이지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것이 설령 새
드엔딩일지라도.
[와. 이젠 답장도 안 하죠?ㅡ.ㅡ 사람들이 저 혼자 서있으니까 불쌍하게 쳐다봐요.]
손시연의 문자는 나만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나 혼자가 아니라 손시연과 함께 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답장 대신 역에서 내리자마자 뛰어갔다. 손시연이 있는 곳으로.
'주말에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요즘에 맨날 시간 없다고 하고 답장도 안 하고. 나 정말 삐진 거 알죠?
알아서 해요.'
'약속시간보다 10분은 일찍 왔는데 무슨, 네가 너무 일찍 다니는 거야. 빨리 예매하러 가자. 오늘 공포형
화보는 날인 거 알지?'
'아.... 그랬나?'
손시연이 공포영화라는 말에 움찔한다. 아마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면 대충 어영부영 넘어가
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랬나는 무슨, 자 때마침 영화관 앞이고. 저녁 먹기 전에 예매는 해야 되고. 물러설 곳이 없네 손시연?
자, 네가 앞장서.'
영화를 예매하려는데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따라오던 손시연이 상영표를 유심히 보면서 내 손을 잡아
끈다. 은근슬쩍 다른 영화를 예매하게 할 심산이다.
'와. 가필드 한다. 아저씨. 가필드 알죠? 나 꼬꼬마잖아요. 이거 봐요. 나 이런 거 엄청 좋아함.'
자기 스스로 꼬꼬마라고 하는 거 보니까. 엄청 급하긴 급한가 보구나 너? 그래도 안 돼. 나도 너 백화
점 갈 때 짐 들어줘야 되잖아. 약속한 건 지켜야지.
나는 옆에서 계속 다른게 재밌을 거 같다고 떼를 쓰는 손시연의 말을 무시하고 공포영화를 예매했다.
그제야 손시연도 체념하고 나를 따라온다. 근처에 있는 샤브샤브 집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손시연이
학교랑 학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것저것 신나서 늘어놓는다. 그러다가 자기만 너무 많이 말하고 있는
걸 깨달았는지 갑자기 이야기를 멈춘다.
'왜? 계속하지. 엄청 시끄럽고 귀 아파서 좋은데 뭘.'
'아저씨 진짜 웃긴다. 막상 옆에 있으니까 이젠 시끄러워요? 목소리 듣고 싶다고 전화할 때는 언제고.'
응. 네 목소리 듣고 싶었어. 네가 이야기할 때 듣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 그래서 가만히 있었던 거야.
'요즘 정말 바쁘나 봐요? 주말에 시간 안된다고 보지도 않고. 나 이제 벌써 개학이에요. 아저씨가 보고
싶다고 해도 자주 못 봐요. 있을 때 잘해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 개학할 때가 됐구나. 저번 주말엔 집에 내려가느라고 바빴어. 마음이 안정돼
지 못하고 혼란스러워서 널 마주할 여유가 없었던 것도 있고... 사실 나, 다음 주에 누구 보기로 한 사람
이 있거든. 걱정하지는 마. 내 마음이나, 결심은 확고하니까. 만나자마자 말해줄 거야. 냉정해 보여도 어
쩔 수 없어. 내가 이제껏 마음속으로만 되뇌던 말들을 다 해버릴 거야.
다만, 걱정되는 건 실제로 둘이서 마주 봤을 때 내 심정이 어떨지는 확신을 못하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
건, 어떻게 쏘아붙이건 사실 중요하지 않아. 나는 정말로 그 애를 좋아했었거든. 그런데 지금 널 보니까
마음이 놓여. 다른 사람 말고, 널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저하지 않을게. 주저하지 않고 강
소영과의 마지막 페이지에 등장할 거야.
'또 혼자 딴생각한다. 아저씨 뭔 고민 있죠?'
신기해. 너 여자 맞구나? 그냥 보면 선머슴 같고 푼수에다가 너무 긍정적이라서 걱정스럽기까지 한데 가
만 보면 직감 하난 되게 뛰어난 거 같아. 내 모습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맞춰버리잖아. 아픈지, 고민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밑도 끝도 없이 고민은 무슨, 그런 거 안 키우거든?'
'나 아저씨 성격 잘 알잖아요. 부끄러워서 어떡하나~ 우리 아저씨 나한테 속마음 들켰네?'
'혼자 잘 노네. 그래, 내 성격이 뭔 줄 알고 그렇게 착각하는 건데? 심심한데 너 혼자 노는 거 구경이나
해보자.'
'아저씨 성격요? 음... 무뚝뚝하고 까칠하고, 자존심 엄청 세고, 근데 생각보다 소심하고 혼자 마음속에
담아두고 끙끙 앓고... 또 뭐가 있을까. 아! 좋으면서도 부끄러우면 괜히 안 그런 척 속마음이랑 다르게
행동하고. 또 아~주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착한 면도 조금 있고 뭐 이 정도?'
하.. 놀랍도록 정확하구나.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네가 그렇게 정확하게 짚어버리니까 부끄러워진다.
언제 내 성격까지 그렇게 정확하게 파악해버렸니. 그 정도로 가까워졌나 봐. 우리.
'전혀 공감 안 가. 분석해보려면 더 그럴듯하게 해보던가.'
'아저씨. 내 성격은요? 내 성격은 어떤 거 같아요?'
'공격적, 충동적, 본능적, 단순 과격. 더 궁금한 거 있어?'
'에~ 속으로는 정말 착하고 얌전하고 조용하다고 생각하고 있죠? 또 들켰네? 우리 아저씨? 얼굴 빨게
졌데요~'
'너 오늘 개그콘서트 준비해왔어? 어쩔래? 여기서 빨리 뛰어가면 한 5분 정도는 여유 있을 거 같은데.
준비한 거 또 있으면 더 해보던가. 아니면 쇼 그만두고 그냥 가던가.'
'아저씨 너무 부끄러워한다. 그만해야지.'
오늘따라 나를 못 부끄럽게 해서 안달인 손시연을 데리고 CGV에 갔다. 언제나 그랬듯 팝콘이랑 음료
수는 손시연의 몫이다. 자리에 앉고 조금 지나자 조명이 꺼진다. 그런데 손시연의 모습이 평소와 많이
다르다. 너 되게 긴장했어. 겁에 질린 얼굴로 눈만 똥그랗게 뜨고 팝콘만 계속 먹고 있잖아. 성격 탓인
가. 난 왜 공포영화가 하나도 안 무섭지.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귀신을 봐도, 무서운 장면을 봐도, 무덤
덤 하기만 해. 저걸 왜 무섭다고 하는지 모르겠어.
야 그냥 겁먹지 말고 영화 봐. 별로 무서운 영화도 아닌 거 같구만. 아까부터 영화 보는 시간 보다 고개 돌
리고 있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아. 돈 아깝지도 않니.
'꺄악!'
헉. 진짜 하이톤이다. 네 비명. 네 소리가 귀신소리보다 더 커 그리고 왜 이렇게 부담스럽게 달라
붙는 거야? 손 좀 놔봐. 진정하고. 네 자리에 차분하게 앉아서 보지 좀?
'아저씨 진짜 나쁘다. 무섭다는데 왜 뿌리쳐요? 장난 아니고 진짜 무서워서 그러는 거거든요?'
좀 조용히 해. 영화관이 너네 집 안방인 줄 알아? 윽! 또 소리 지르고 달라붙네. 근데 저 장면에서 대
체 왜 소리를 지르는 거야? 이해가 안 돼. 제발 비명을 질러야 될 때 지르란 말이야 왜 귀신 나올 타이밍
이 아닌데도 시도 때도 없이 비명을 질러 대? 네가 먼저 비명 질러대니까 정작 비명 질러야 될 때 사람들
이 김빠져서 가만히 있잖아.
봐봐. 저기 옆에 혼자 영화 보는 아저씨 한 명이 우리 쪽을 계속 째려보고 있어. 다른 사람들도 은근히
우리 쪽을 주시하고 있고. 넌 사람 많은 곳에서 너무 부끄러워할 줄을 몰라
손시연이 또다시 비명을 지르려고 한다. 더 이상은 안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재빨리 손시연의 어깨를
붙잡고 입을 막아버렸다.
'웩..'
아 더러워 내 손바닥에 네 침 다 묻는다. 그래도 이렇게 해야겠어. 더 이상 소리 지르면 민폐야. 네가 지
레 겁먹고 무섭다고 생각해버리니까, 전혀 무섭지 않은 장면에서 깜짝깜짝 놀라는 거라고.
내가 손시연의 입을 막는 걸 보고 옆에 앉은 관객들 몇 명이 큭큭 거린다. 저것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다
고 웃는 거야? 공포영화 무서워서 비명 지르는 거 처음 봐?
'저 아저씨..'
너무 오랫동안 입을 막았나? 손을 떼자 손시연이 불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면서 말한다.
'더 이상 못 보겠어요. 그냥 나가면 안 돼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공포영화 싫어하는구나? 이 정도일 줄 알았으면 네 말대로 가필드나 다른 꼬
꼬마들이 보는 영화 볼 걸 그랬네. 그래 나가자. 보기 싫은 거 억지로 보게 하기는 싫어. 와 고맙게도 한
가운데네, 우리 자리. 안 그래도 대책 없는 네 하이톤 비명 때문에 언짢았던 사람들도 짜증 나겠다.
'미안합니다. 잠깐만 지나갈게요.'
밖으로 나왔는데 손시연이 정말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헉. '하얗게 질린다'라는 표현이 현실
에도 적용되는 말이었구나. 네 얼굴 지금 엄청 창백해. 무슨 아픈 사람같이 핏기가 하나도 없어.
나는 손시연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바닥으로 볼을 비벼줬다. 얼굴이 차갑다.
'야 괜찮아? 물 줄까?'
손시연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는 물을 하나 뽑아서 뚜껑을 따고 건네줬다. 손시연이 그걸 받아서 마
신다. 조금씩 진정이 되는 모양이다.
'아저씨 정말 나쁜 거 알죠? 누구는 무서워서 소리 지르고 안기는데 매몰차게 뿌리치고 입막기나 하고.'
'더워 죽겠는데 막 달라붙으니까 그렇지. 내가 미안해. 오늘 이후로 공포영화는 절대 보지 말자. 다른
영화라도 볼래?'
'아니요. 아저씨, 우리 그냥 밖에서 걸어요.'
손시연과 나는 그렇게 영화의 반도 체 못 보고 영화관 밖으로 나와 명동 주변을 걸었다. 얘 아직도 공포
영화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계속 멍 때리는 표정으로 걷고 있어. 정신 좀 차리지?
그때 골목에서 배달 오토바이가 우리를 미처 보지 못하고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손시연 위험해! 앞을
보고 가야지.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서 손시연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오토바이가 내 왼팔을 스치고 지나간다.
손시연의 구두 한쪽도 벗겨져서 길 한쪽으로 나뒹군다. 나는 오토바이를 향해 소리쳤다.
'이봐요! 그렇게 막무가내로 운전하면 어떡해요! 사람 다칠뻔했잖아요.'
놀란 오토바이 주인이 멈춰 서서 머쓱한 얼굴로 괜찮으냐고 묻는다.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아저씨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서 오토바이를 그냥 보낸다.
'야 너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 앞 안 보고 가? 부딪힐뻔했잖아!'
나도 모르게 손시연에게 화를 낸다. 다칠뻔했잖아. 오토바이에 부딪히기라도 했으면 어쩔뻔했어? 생
각도하기 싫어 그런 거.
'미안요. 잠깐 넋 놓고 있었나 봐요. 아저씨 괜찮아요?'
'너 발 안 다쳤어? 잠깐 저기 벤치에 앉았다가 가자'
벤치에 앉고 나서 나는 손시연의 구두를 벗겨서 다친 데는 없는지 살폈다. 자세히 보니 발목 부분이 약간
빨개진 거 같기도 하다. 나는 발목을 잡고 살짝 누르면서 물었다.
'안 아파 여기?'
'괜찮아요. 어? 아저씨, 팔에서 피 난다. 어떡하지?'
피? 아까 오토바이랑 부딪히면서 상처가 난 모양이다. 왼쪽 팔뚝 부분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
다. 손시연이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서 피를 닦아준다.
'내가 할게 이리 줘봐.'
'약국도 다 닫았는데 미안해요. 나 때문에..'
'야 내가 한다니까!'
또다시 나도 모르게 소리를 높여버렸다. 손시연이 깜짝 놀란다. 난 이런 거 없애야 돼. 기분대로 화내어
리고 언성 높이는 거. 걱정돼서 그러는 애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렇게 혼자 물티슈로 팔뚝 언
저리를 닦는 나를 쳐다보면서 손시연이 말한다.
'아저씨 또 그런다. 괜히 걱정되니까 화내는 거죠?'
나는 그런 손시연의 얼굴을 같이 바라본다. 그리고는 한숨을 푹 쉬면서 오른손으로 손시연의 어깨를
감쌌다. 벌써 어둑어둑해져서 반짝이는 별들도 몇 개 보인다.
너 정말 귀신이다. 네 말이 맞아. 이젠 내가 화내고 나서 혼잔 미안해할 필요도 없네. 이렇게 네가 다 알
아서 이해해주니까 고마워 혼자 미안해하지 않게 해줘서.
'그래. 걱정됐다. 어쩔래? 아까 영화관부터 시작해서 소리 지르고 오토바이에 부딪힐뻔하고 너 걱정돼
서 아주 죽는 줄 알았다. 됐어?'
그 말에 손시연이 웃음을 터뜨린다. 나도 그런 손시연을 보고 따라서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도 아까 아저씨 엄청 멋있었어요. 확 끌어당겨서 오토바이도 피할 수 있게 해주고'
네가 그런 립 서비스도 해줄 줄 알고 많이 컸네. 이제 좀 진정이 되는 거 같아. 여기서 계속 앉아있자. 잠
시만 생각 없이 앉아서 쉬자
'아저씨 근데 고민이 뭔데요? 저 다 눈치챘으니까 말해봐요.'
손시연이 내 어깨에 기대면서 묻는다. 그래, 숨길 건 없지. 말할게. 대신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좀 그래
이해해 줄 거지?
'그냥, 예전 친구랑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그랬어.'
'싸웠어요? 나도 친구랑 싸우고 나면 진짜 며칠 내내 불편하던데. 친한 친구일수록 더 그렇다고 먼저
화해하자고 하기도 애매하고. 그죠?'
네 말이 맞아. 가까운 사람일수록 나를 더 힘들게 하고 슬프게 해. 그래서 안타까워. 안타까운데, 그걸
쉽게 내색하기가 어려워 상처받을까 봐. 나만 손해 볼까 봐
'그냥 아저씨가 먼저 화해해요. 옛날 일 때문에 계속 고민할 필요 없잖아요? 그 사람한테 미안하다고
할 필요는 없어도 확실하게 화해하고 앙금 없이 넘어가요. 그럼 되잖아요?'
와, 내가 너한테 고민 상담까지 다 받네. 고마워 네 말이 맞아. 확실하게 해야지. 언제까지 예전 기억에
붙들려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리고 아저씨 요즘에 담배 피우는 거 다 알거든요? 그것도 좀 끊죠?'
'어, 너 어떻게 알았어? 나 담배 피우는 거.'
'아저씨 옆에 있으면 지금도 담배 냄새 엄청나거든요? 아까 손으로 내 입 막았을 때도 났고. 나한테 어
린애가 담배 피우려고 한다고 막무가내로 라이터 뺏어갈 때는 언제고 왜 담배 피워요?'
담배 피울 일이 있었어.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이 담배 피운다고 라이터 뺏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너
한테 담배 피운다고 혼나고 있네.
'알았어. 지금부터 하나도 안 피울게.'
'자요 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손시연, 우리 지금 되게 붙어있는 거 알아? 얼굴도 가까이 있고 어깨도 감싸고 있고. 분위기 묘해. 처
음 손잡을 때 느낌이랑 비슷해. 네 얼굴에서 향기가 나. 짙지는 않지만 기분 좋은 냄새야. 향수 냄새는
아닌 거 같아.
키스해도 될까? 난 지금 그러고 싶은데. 네가 원할지는 모르겠어. 그래도 키스하고 싶어. 네가 거부한
다면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괜찮아. 키스를 하든 안 하든 소중하거든 지금 이 순간들이
나는 고개를 돌려서 손시연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다. 손시연이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는
지 괜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서 가방을 뒤적거린다.
'어? 내 폰 어디 갔지. 여기 있구나 이 폰 이제 바꿀 때도 됐는데. 하하. 아저씨 명동에서도 별이 다 보이
네요? 아주 선명하게 보이네, 그죠? 저기.. 아저씨 담배 냄새난다. 담배 좀 끊어요.'
횡설수설하기는, 네가 그러니까 나도 어색해지잖아. 에라 모르겠어. 그냥 다가갈게. 그렇게 싫으면 아
까처럼 비명 지르고 뺨이라도 한 대 때리던가.
모르는 척 피하던 손시연도 내가 계속해서 다가가자 찡그리듯이 눈을 감는다.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키스해본 지도 정말 오랜만이야.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그냥 무작정 다가가고만 있어.
이해해줘 서툴더라도.
그때 손시연이 가방에서 꺼내놓은 폰이 갑자기 울린다. 벨 소리를 엄청 크게 해놨는지 우리 둘 다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리듬 한 번 정말 경쾌하구나. 정신없는 게 너랑 딱 어울려. 덕분에 겨우 잡아놨던 분위기도 다 깨졌네. 고
맙니다. 휴대폰아.
손시연이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 전화다.
'네 지금 밖에서 놀고 있어요. 명동에서요. 빨리 들어갈게요.'
휴... 일어서자 우리. 아버지랑 방금 통화한 여고생한테 키스하고 싶은 마음 따윈 아까 없어져 버렸어.
'진짜 타이밍 한번 좋다. 그지? 우리 너무 오래 앉아있지 않았냐? 일어나자. 아버지한테 전화도 왔는
데 빨리 집에 가야지.'
내가 일어나서 손을 내밀자 손시연이 미소 지으면서 그 손을 잡고 일어난다. 결국에 키스하지는 못 했다.
그래도 괜찮다. 아까 느꼈던 내 느낌은 그대로다. 소중하다. 지금 이 순간들이. 하나 더 약속할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누가 내 마음을 흔들어 놓더라도 놓지 않을게. 네가 먼저 잡아준 그 손을.
#17. 회상, 2004년 12월 3일
'소영아 너 안 추워?'
'추워... 위에 좀 두꺼운 걸 입고 올 걸 그랬나 봐.'
난 별다른 주저 없이 교복 마이를 벗어서 소영이 어깨에 감싸준다. 기다렸다는 듯이 하얀색 교복 셔츠
에 찬바람이 밀려 들어온다. 하얗게 소복히 눈이 쌓인 거리, 거기에 새하얀 내 교복 셔츠까지 시야에
들어오자 잠시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어지러움을 느낀다. 모든 게 새하얗다.
'야 왜 카디건도 안입고 왔으면서 마이까지 벗어줘? 조끼도 안 입고 왔네?'
'나 추위 안 타는 거 몰라? 그냥 벗어 준다고 할 때 입어.'
'싫어 나 안 입을래. 그냥 너 입어. 그러나 감기 걸려.'
소영이는 마이를 벗어서 나에게 주려고 한다. 나는 그런 소영이의 어깨를 꽉 잡는다. 차가운 바람과는
전혀 다른, 소영이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난 감기 걸려본 적 거의 없거든? 춥다면, 난 안 춥단 말이야 그리고 넌 치마 입었잖아.'
'치마 입어도 스타킹 신으면 얼마나 따뜻한데.'
'뻥치시네. 그렇게 얇고 다 비치는 게 뭐가 따뜻하다고 그러냐.'
'네가 몰라서 그래. 정말 따뜻해. 스타킹 벗어줘? 진짜 입어볼래?'
스타킹 신은 최성민의 모습이라... 내가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더 추워진 거 같아. 알았어 스타킹 신
으면 따뜻하다고 치자.
'몰라. 그냥 내 마이 걸치고 있던가 정 싫으면 버리고 가던가 해 그럼.'
그제야 소영이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내린다. 난 키가 크지 않지만 어깨는 넓은 편이라. 내 교
복 마이를 걸친 소영이의 모습은 마치 어른 옷을 입은 아이 같다. 헐렁헐렁할 뿐 만 아니라 팔이 미처
다 빠져나오지 못해 교복 팔 부분이 팔랑 거린다,
소영아, 방금 내가 안 춥다 그랬나? 안 춥기는 개뿔 무슨 바람이 이렇게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까
카디건이라도 입고 올걸. 미련하기는 그래도 눈 오니까 좋다.
소영이가 교복을 걷어서 오른쪽 손을 나오게 한 다음에 내 손을 잡는다. 부드럽다. 따뜻하다. 그런데 소
영이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앗. 야 너 손 정말 차가워 지금 얼음 같아.'
소영이는 내 손을 잡고 따뜻한 입김을 불어준다. 소영이의 하얀 얼굴이 찬 바람 때문에 약간 불긋하게
상기돼 있다.
'야 괜찮아 괜찮아. 그냥 가자니까. 평소에는 신경도 안 쓰더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걱정이 많아?'
내가 손을 놓으려 하자 소영이가 내 손을 다시 잡고서 자기 주머니에 넣는다. 그것까지 거부할 필요는
없다. 나는 소영이 손을 꽉 잡는다. 소영이가 그런 나를 쳐다보면서 묻는다.
'성민아 우리 대학가서도 자주 만나야 되는데. 그치?'
'걱정 마. 대학 가면 시간 남아돈데. 놀 때도 많고.'
'너 서울대나 고려대 붙고 나 이대 붙으면 좋겠다. 그치 그치?'
서울대... 붙으면 좋지. 근데 아마 간당간당 할 거 같아. 내 점수. 김창수처럼 수석일까 차석일까 하는 수
준이 아니라고. 너도 간당간당 하잖아. 이화여대 가는 거, 우리 이러다가 둘 다 재수하는 거 아닐까? 후후
농담이야 농담.
소영이가 갑자기 앞으로 폴짝 뛰어가서 나를 마주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성민아.. 너 아까처럼 네 마음대로 내 손 놓거나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응..? 알았어. 근데 너 손 되게 따뜻하다. 무슨 난로도 아니고, 화상 입겠다.'
'그냥 화상 입어. 내가 손 놔주면 그때 손 빼. 먼저 손놓는 사람이 손바닥 맞기다?'
손 놓지 말라는 소영이의 말, 무슨 의미였을까? 되돌아서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난 그냥 소영이 말
대로 계속 손을 잡고 있었다. 언제 그 손을 놓고서 집으로 돌아갔는지는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18. 강소영
'성민아, 여기.'
민들레 영토 앞에 소영이가 서있다. 분명히 강소영이 맞는데 뭔가 많이 달라진 느낌이다. 가까이 다가
가기 힘들다. 어깨에 손을 가져가기도 힘들다. 손을 잡는 건 더더욱 상상할 수 없다. 강소영은 예전처럼
내 앞에 있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심리적인 장벽은 서로를 밀어내려고 안달이다. 시간은 다시금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나는 그걸 새삼 다시 깨닫는다.
'우리 그냥 여기 들어가자. 괜찮지?'
소영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민들레 영토로 들어가는 것조차도 어색하다. 소영이를 먼저 들어가게 해
줘야 하는데 어떡하지? 손을 잡고 들어가기도 뭐하고 어깨를 감싸서 들어가기도 뭐 하다. 그냥 어색
하게 거리를 두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별것도 아닌 일인데. 단지 커피숍에 들어가는 것뿐인데. 작
은 부분마저도 어색해졌어. 우리
이렇게 된 거, 누굴 탓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시간을 탓해야 하는 거니. 조금 슬프다. 이런 느낌, 우리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자리에 앉았는데도 막상 할 말이 없다. 이럴 때 나 라도 분위기 풀어주고 말 좀 건네고 해야 하는데, 무
뚝뚝하기만 한 놈이 그럴 리 만무하다. 어색하게 휴대폰이나 계속 확인하고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
고 있는데 소영이가 먼저 말을 꺼낸다.
'너 예전이랑 그대로인 거 같아. 잘 지냈지?'
'잘 지냈냐'라는 말, 너와 헤어진 이후 어떻게 지냈냐는 의미겠지?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애매해. 한마
디로 잘라서 말하기가 힘들어. 손시연을 만나기 전까지는 솔직히 힘들었지. 괴롭기도 했고. 근데 지금
은 행복해. 공허감도 많이 없어졌고. 네 생각도 많이 지울 수 있었어.
'그냥 뭐... 잘 지냈지. 너 이대 근처에서 하숙하는 거야?
'응. 너도 주변에서 하숙하지? 근데 신촌에서는 한 번도 못 봤네,,,'
마침 주문했던 차와 음료가 나온다. 나는 그걸 핑계삼아 다시금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있다. 아. 녹차
라떼. 소영이 너 녹차라떼 정말 좋아했었지. 뭐 먹을 때 맨날 그것만 먹어서 내가 슈렉이라고 놀렸잖아.
다 지난 일이네. 내가 널 놀리던 일도, 교복 입고 녹차라떼 먹던 일도. 정말 오래 전인 거 같이 느껴져.
'저기... 성민아...'
왜 이렇게 두려울까.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네가 하는 말인데. 예전 같으면 가슴이 떨리고 설렜어야
하는데. 지금은 무슨 말할지 걱정돼. 그래도 난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들어야 해. 너와 확실하게 하려고
여기 온 거란 말이야. 말해 소영아. 그렇게 주저하지 말고.
'왜? 할 말 있으면 해도 돼.'
'응... 근데 지금 되게 어색하다 그치? 우리 원래 안 이랬는데.'
소영이가 미소 지으면서 말한다. 이렇게 소영이 눈을 쳐다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더 예뻐졌네. 너 소개
팅이나 미팅할 때 인기짱이 있겠다.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어. 오늘 너를 완전히 잊을 거야.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울 거야. 그리고 아마 지금 이 순간이 널 마지막으로 보는 날일 거야. 우연히 마주치는 일 조
차 없을 거야. 그러니까...
'모르겠어. 나, 여자가 이런 생각하는 게.. 이런 말하는 게 부끄러울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래도...'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 소영이의 얼굴. 울지 마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어 소영아. 그냥 말해. 처음엔
네가 정말 야속했었어. 실망스러웠고.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난 너를 미워하지 않아. 그냥 당당
하게 말해주면 안 돼? 내가 마음 아프잖아.
'나, 지나간 일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한다면... 그냥 그렇게 생각해도... 받아들일 게. 뭐냐면
나는... 부끄러운 거 상관없이 내 진심을 말하는 거니까.'
소영이는 마음이 여린 여자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너무 어렵게 꺼낸다. 말할 때마다 소영이 가슴에 생
채기가 나는 느낌이다. 그게 내 눈에 선하게 보인다. 그게 나를 더 괴롭게 한다.
'혼란스러웠어. 그냥 너랑 1년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게. 내가 공부하는 너한테 방해가 되지는 않을지,
네가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게 맞는 건지.. 나는 너를 정말 좋아했는데. 너는 별로 고민한 흔적도 없이 냉
정하게 재수해 버리겠다고 하니까..'
'소영아.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을게. 나도 괴로웠어.'
정말이야. 나 괴로웠어. 솔직히 소영이 네가 이렇게까지 힘들어했는 줄 몰랐어. 그건 내 실수야. 그래
도 내가 괴로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왜 재수했냐고? 말로 해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거야. 아마. 왜
친한 친구 사이인 창수랑 나 사이에 그런 전선이 형성돼 있었는지, 대체 왜 형태를 알 수 없는 경쟁의
식 때문에 전의를 불태웠어야 했었는지.
'헤어지자고... 말하면서도 난 네가 잡아주기를 바랐는데. 넌.. 그냥 흔들림 없이. 그렇게 하자고 했잖
아. 돌아보지도 않고 걸어 나갔잖아. 난 그날 이후로 너무 아쉬웠는데, 네 생각 때문에 잠도 못 잤는데
힘들었어. 계속 힘들었어. 지금도..'
난 그냥 잠자코 소영이의 말을 들었다. 겨우겨우 힘들게 말하고 있는데 별 의미 없는 대답이나 피드백
으로 끼어들기가 싫다. 소영이는 지금 높은 탑을 힘들게 쌓아 올리고 있는 사람 같다. 그동안 흩어져
있던 파편들을 겨우겨우 찾아내서, 자기 손에 피가 나는 지 알면서도 탑을 쌒아 올리는 사람. 조금이라
도 잘못되면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소영이를 도와줄 수가 없다.
'대학 가서 너 잊어 보려고 남자친구도 사귀고 했는데... 난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 했던 거 같아. 난 항
상 그대로였어. 그런데 그대로일 수가 없었어. 그렇다고 너한테 연락할 용기도 안 나고, 가까이 살고 있
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소영아. 왜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거니, 그런 말은 서로에게 상처야.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건데?
너는 물론이고 나도 상처가 나버렸어 지금. 그 말은 안 하는 게 더 좋았을 텐데. 너한테 너무 미안해지잖
아. 화가 나. 너한테도 화가 나고, 그보다 나 자신에게 더더욱 화가 나.
'소영아. 고작 그런 말하려고 온 거야? 이기적이라는 생각 안 들어?'
나란 놈은 또다시 제 기분을 주체 못 하고 소리부터 질러버린다. 항상 자제하려고 해도 이 모양이다.
'응... 나 이기적이야.. 그치? 나 정말 이상한 애 같아. 내가 생각해도 그래.'
소영이가 운다. 언성 높여서 미안. 내가 심했어. 사과할게. 그러니까 울지 마.
'성민아 바보같이 울어서 미안해. 근데 화내지 마. 속으로 바보 같다고 욕해줘. 응?'
미치겠다. 가슴이 터질 거 같다.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버리고 싶다. 안돼. 그러면 힘들게 너를 보
러 온 의미가 없어져. 여기 남아서 뭘 해야 할까? 너한테 상처 주는 말 되풀이하면서 이제 그만 보자고
쏘아붙일까? 난 이랬으면 좋겠는데. 내가 너한테 오늘 이후로 끝내자고 냉정하게 말해버리고, 너는
최성민 이 나쁜 자식, 개자식 한바탕 욕을 해버리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밤새워 기도했었는데. 결국 이
렇게 돼 버리고 말았네. 너는 울고 나는 마음 아파하고.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소영이의 눈물이 조금씩 잦아든다. 소영이가 다시금 입을 연다. 슬로 모
션처럼 소영이의 모습이 내 눈앞에서 천천히 흘러간다. 소영이의 손, 입, 얼굴, 어깨 천천히 움직인다.
소영이가 무언가 이야기한다.
'솔직하게 말할게. 성민아. 우리 다시 시작해볼래? 너만 괜찮다면 나 그러고 싶어. 예전처럼 너랑 함
께 하면서 대학 다니고 싶어. 우리 좋았잖아. 고등학교 때 너랑 사귀면서 행복했거든.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어.'
왜 하필 지금... 예전에 네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자존심 다 버리고 너를 붙잡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아니면 손시연이랑 만나기 전에 너에게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면, 또 달라졌을까? 어찌 됐든 현실은 바
로 지금 이 순간인데. 그렇다면 내 대답도 하나야. 그럴 수 없어 소영아.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대답이야.
'난 그렇게 할 수 없어. 그 말하려고 나왔어 오늘. 나 그만 일어날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영이가 내 손을 잡는다. 나는 그런 소영이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칠 수 없다.
슬프다. 병신같이 아주 조금 눈물이 난다. 이런 모습, 별로 안 좋은데. 소영이한테 눈물을 보여주기는
싫다. 마음이 아프다. 나는 소영이를 끌어안아 버렸다. 눈물을 감추고 싶기도 했고 소영이와의 지난
일이 생각나기도 했다. 네 진심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어... 너무 늦었어 소영아. 우리 그만 끝내자. 난
이제 이렇게 너를 꼭 안아줄 수 없어. 나 다른 여자랑 다시 시작했어. 그리고 난 그녀에서 상처를 줄
수 없어. 내 상처를 씻어준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어. 네가 원망해도, 난 그녀만 보면서 살 거야.
그녀만 사랑할 거야. 이제... 너는 아니야. 미안해.
나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소영이한테 건넨다. 겨울에 쓰는 장갑이다. 남자 장갑 답지 않게 하트 모
양이 있고 그 양옆에 강소영과 나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소영이가 나에게 줬던 선물이다. 손이 너무
차갑다고, 다시는 바보같이 남자다운 척 옷 벗어줘서 감기 걸리지 말라고.
장갑을 건네준 의미가 무엇인지 소영이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나는 소영이를 남겨두고 그
렇게 나와 버렸다. 아직은 겨울이 아니다. 그때처럼 바람이 차갑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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