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ire의 의대생 이야기 2

펌 썰 2017. 4. 11. 23:12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0420() 005852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9 : 해부 실습

 

 

나는 '일리아드' '오딧세이' 전체를 통해 영웅이 한쪽 팔이나 한쪽 다리를 잃은 예를 발견한 적이 없다. 신화는 괴물들에게만 불구의 형벌을 뒤집어씌웠던 것이다.

 

                                             - E. 윙거. '유리창의 꿀벌들'

 

                                                

사람의 몸은 아름다운 거라고  쉽게들 말하지만 그건 '건강한' 사람의 경우에나 그렇다. 시체들(cadaver)의 몸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시체와의 첫 대면, 창밖은 화창했지만 해부실에는 요사스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한 방에 4개씩의 테이블이 있고 테이블 위에는 파란 천으로 덮인 시체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윤경이는 그 광경에 벌써 질린 듯 울면서 뛰쳐나가고....

 

 

장갑을 꼈지만 주저하면서 천을 걷었다. 시체는 두꺼운 비닐에 싸여 아직도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습기가 마르는 것을 막기 위한 비닐을 벗기자 드디어 우리 조(10)와 한 학기를 보낼 시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비쩍 마른 남자. 피부는 다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었고 눈을 채 못다 감은, 입도 약간 헤벌어진 처참한표정. 그러나 그보다 먼저 우리를 덮쳐온 것은 코를 찌르는 포르말린 냄새였다.

 

최루탄을 연상시키는... 사후 강직으로 인해 약간 뒤틀린 자세.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30? 아니면 40? 머리가 검고 주름살이 적어 그보다 더 나이 든 시체는 아닌 게 분명했다.

 

 

첫날은 면도칼로 온몸의 털이란 털을 모조리 깎는다. 그러나 포르말린에 얼마나 담가 두었는지 피부가 불어 같이 슬슬 벗겨졌다. 까치집처럼 뒤엉킨 머리와 그밖의 모든 체모를 밀어내자 이제 제법 해부학 그림책(atlas)에서 보는 시체다운 모습이 되었다. 4구중 하나는 여자 시체인데 털을 깎고 나면 언뜻 보아서는 남녀 구별이 안되는 할머니였다.

 

 

아직 본격적인 해부는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실습을 끝내고 나서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저녁식사 시간인데도...

 

 

다음날부터 해부는 시작되었다. 피부를 벗기고 정맥을 발라 내는 일부터...

 

그림책의 그림들이 얼마나 idealize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도대체 각종 섬유들이 너덜너덜하게 얽혀 도저히 그림책처럼 깨끗이 발라낼 수가 없었다. 옆방에는 젊은 여자의 시체가 있었는데 제법 하얀 피부와 머리를 깎고서도 여전히 예쁜 얼굴 때문에 애들이 차마 칼을 대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찾아온 조교가 그 시체의 코를 잘라버린 후에야 칼질을 할 수 있었다...

 

 

해부를 마치고 나면 저녁 시간이다. 그러나 몸에 짙게 배어버린 포르말린 냄새와 그 사이를 비집고 스며나오는 시체 특유의 퀴퀴한 냄새 때문에 식욕이 나질 않았다.

 

의대 도서관은 본과 1학년들이 뿜어내는 시체 냄새로 인해 특유의 묘한 분위기를 띤다.

 

 

해부학은 본과  1학년 1학기동안  개설된다. 전체 강의는  3부분(팔다리, 머리와 목, 몸통)으로 구분되어  3번 시험을 본다. 그리고 매번의  시험에는 실습 시험(땡시험)이 있다. 땡시험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어쨌든 첫 해부는 다리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다리 부분을 샅샅이 찢어내고 나면 슬슬 해부에 익숙해진다. 칼질 솜씨도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 윤경이도 애들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고 열심히 여기저기를  만지작거리고 당겨본다. 게다가 이때쯤이면 이미 맨손으로 해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엔 장갑을 끼고서도 거북하던 것이 이제는 맨손의 섬세한 감각을 위해 거의 아무도 장갑을 쓰지 않는 거다. 그리고 몸에 밴 시체 냄새에도 이미 무감각해진 지 오래. 저녁에 식욕이 없다는 것도 옛날얘기다.

 

 

실습 시험 전날이면 실습실은 장터처럼 수선스럽다. 시체는 개인차가 워낙 심해 다른 조 시체를 보지 않고서는 실습 시험을 볼 수 없는 거다. 다들 여기저기 몰려 다니며 너덜너덜해진 혈관과 신경, 근육 이름들을 외느라고 바쁘다. 우리가 해부한 시체의 토막토막이 실습 시험 문제로 출제되니까...

 

 

대부분의 학생들이 돌아가고 나서 staire와 영걸이, 석재, 성현이가 끝까지 실습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시간은 새벽 1시쯤. 갑자기 영걸이가 말했다.

 

", 이런 생각 해봤니? 이 건물에는 지금 시체들이 우리보다 더 많다는 거..."

 

갑자기 으스스한 생각이 들어 시험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집으로 향하고 말았다.

 

 

두번째 부분인  머리와 목을 해부하기  위해 팔다리를 떼어내면  시체는 갑자기 왜소해진다. 어깨가 없어진 사람의 몸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우선 뇌를 꺼내야 한다. 뇌는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다음 학기의 신경해부학 교재로 쓰이는 것이다. 시체의 머리에 빙 둘러 금을 긋고 실톱으로 두개골을 톱질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맑던 하늘이 갑자기 어둑어둑해지더니 급기야

 

마른 천둥이 치는 거다. 애들은 기겁을 해서 톱을 내려놓고 매점으로 향했다.

 

'좀 있다가 해야지...'

 

 

날씨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말짱해지면 다시 실습실에 모여 톱질을 하고, 그러다 보면 또 천둥 번개가 치고. 이상하게도 끝내 비는 오지 않고... 해부하다가 입에 한 조각 튀어 들어가도 뱉으면 그만인 경지에 이르렀지만 역시 찜찜하다.

 

 

머리뼈의 덮개(calvaria)를 떼어내면 뇌막을 가위질해서 열고 손으로 뇌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당기며 12쌍의 뇌신경 뿌리를  끊어낸다. 그리고 나서 목 뒤의 1-2번 내지 2-3번 척추뼈  사이에 칼을 꽂아 연수를 자르면 뇌는 깨끗이 분리된다. 날씨 탓인지 누가 칼을 꽂느냐 하는 문제로 또 한참 실랑이가 있었다.

 

 

이제는 머리를 좌우로 두쪽낼 차례다. 그림책의 머리 단면을 보며 뼈가 있는 부분은 톱질을 하고 그렇지 않은 곳은 가위로 자른다. 마지막으로 입속에 가위를 넣어 혀를 좌우로 잘라주면 머리는 좌우로 갈라진다. 그러나 몸통에 여전히 붙어 있어 묘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마치 머리가 둘인 것처럼 보인다...

 

 

눈을 해부할 때면 괜히 제 눈에 뭐가 들어간 것처럼 찝찝하다. 그건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지만 눈처럼 예민한 곳인 경우는 더 심하다. 정관을 자를 때 괜히 움찔하는 남학생이 한둘이 아니다.

 

 

머리부분 실습 시험 전날 시체의 머리 하나가 없어져 화제가 되었다. 시체와 적출물처리에 관한 규정에  엄격히 금지된 일이지만 누군가 집에서 공부하려고 가져간것이다. 그러나 의대생들은 태연하다. '그까짓 머리 반쪽...' 하지만 그녀석이 밤에공부할 때 어머니께서 밤참이라도 준비해 불쑥 녀석의 방을 찾았다면...

 

 

몸통 해부를 마칠 때쯤이면 시체는 거의 빈껍데기다. 조각조각 뜯어내고 가뿐해진 시체를 보면 사람의 몸이 복잡하긴 해도 참 별 것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시체는 위가 주먹만하게 수축해 있었다. 얼마나 굶으면 저렇게 될까? 그리고 폐에는 마치 삶은 감자가 굳은 듯한 색과 질감을 가진 알 수 없는 덩어리 몇 개가 있었다.

 

조교가 폐결핵의 흔적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엉덩이에는 깊은 종기가 나 있었다.

 

환자가 몸을 뒤채지 못해 한 자세로만 누워 있다보면 바닥에 닿은 부분은 혈류가 나빠져 그렇게 썩어 버리는 것이다. 거의 뼈에 닿을 듯한 깊은 욕창(종기)을 보며 말년에 간병해 줄 사람도 없이 외로이 죽어간 폐병 환자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환자는 가끔 돌아 눕혀야 해...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 시체를 쌌던 비닐과 테이블이며 바닥 여기저기에 널린 너절한 조각들만 남기고... 그 부스러기들을 모아서 화장하는 거겠지. 죽어서까지도 편히 잠들지 못했던 분들이 이제나마 편안히 눈을 감으실까... 하긴 그 ''은 이미 조각조각 나버린 지 오래지만.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0420() 021849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0 : 땡시험

 

 

 

땡시험은 해부학 시험의 꽃이다. 배점도 크지만 밤새도록 실습에 열중한 학생과 대충 놀고 지내며 남들이 해부해 놓은 것 구경만 한 녀석들의 차이가 확연하다.

 

 

우선 편한 복장으로 등교해야 한다. 구두는 금물. 조깅한다고 생각하고 길이 잘 든 운동화를 신는다시험 직전에 학생들이 한 방에 모이면  번호순으로 한 명씩 들어가며 시험이 시작된다.

 

 

시험장에는 시체에서 잘라낸 토막들이 배열되어 있고 하나하나  번호가 붙어 있다.

 

시간은 30. 30초 이내에 시체 토막에서 표시된 부분(실로 묶거나 특별한  색이 칠해져 있거나...)의 이름을 써야 하는데 그 이름이 만만찮게 길기 때문에 보는 즉시 생각나지 않으면 망하기 십상이다. 'right recurrent laryngeal nerve'같은 이름을 2-3초 이내로 쓰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30초가 지나면 종을 친다.

 

'' 소리와 함께 2번 문제로 옮겨 가면 두번째 학생이 들어온다. 30초가 지나면 종소리와 함께 세번째 학생이.... 이런 식으로 40문제 정도를 풀고 나면 시험이 끝난다. 마지막 문제를 풀고 나면 손을 씻고 (이때쯤이면 이미 장갑을 끼는 학생은 드물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애들이 기다리는 술집으로 향하는 거다. 이때 누구나 한번쯤 뒤를 돌아보며 시험에 열중하느라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다.

 

"시험이 아니라 괴기전이군..."

 

 

한번은 땡시험 문제가 유리 접시에 담겨 있고 옆에 커다란  돋보기가 놓여 있었다. 돋보기로 열심히 들여다본 문제는 malleus(귀속의 작은 뼈 3개중 하나인 '망치뼈'). 좌우에 하나씩 있는 것이 문제로 나왔을 때는 right, left를 명시하지 않으면 감점 당하는데 이건 간신히 망치뼈라는 걸 알아볼 뿐 좌우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한참 고민하던 staire '' 소리에 놀라 그냥 malleus라고 쓰고 가벼운 푸트워크로 다음 문제를 향해 뛰었다.

 

 

어느 문제는 그냥 시체의 머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도대체 어디의 이름을 쓰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머리(왼쪽 절반)'이라 쓸 순 없고...

 

한참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다 마침내 귀에 작은 플라스틱 조각(빨간색)이 붙어 있는걸 발견했다. 답은 'antitragus  of left auricle'. (귀를 겉에서 볼 때 해부학적이름이 붙어 있는 부분이 몇 군데인지 궁금하신 분을 위해... helix, antihelix, tragus, antitragus, concha, lobule, triangular fossa, scaphoid fossa, tubercle of auricle, external auditory meatus...등이 있어요.)

 

 

1번 문제는 쉽게 내는 게 관례다. 앞 학생이 뛰어들어가면 그다음 학생은 입구에서 미리 1번 문제를 기웃거릴 수 있기 때문에 쉬운 문제를 내어 누구나 맞힐 수 있게 하는 거겠지. 그런데 몸통 부분 시험을 볼 때의 1번 문제는 두고두고 화제거리가 되었다

 

 

staire가 앞의 학생 어깨너머로 슬쩍 기웃거렸는데... 이녀석이 문제를 보더니 씨익웃는다. . 쉽다 이거지? '문제'는 시체의 가슴 부분을 통째로 올려 놓았다.

 

그런데 이거 이상하다... 녀석이 시체의 가슴을 마구 더듬기 시작하는데 이미 미소는 사라지고 황당한 표정이다. 30초가 다 되어 '' 소리와 함께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라고 답안지에 끄적거린다. 거참, 도대체 문제가 뭘까?

 

 

staire는 문제를 읽어보고는 녀석처럼 씨익 웃었다. 시체의 가슴 아래에 있는 쪽지에는 '몇번째 갈비뼈인가?'라고 씌어 있다. 뭐야, 간단하잖아... 어디보자, 하나, , , 네엣... , 다섯, 아니, 여섯? ... 다시... 이거 장난이 아니군. 이렇게 혼란스러울 수가... 골격 표본(dry bone)을 볼 때엔 혼동할 이유가 없었는데... 살이 다 붙은 통갈비짝을 놓고 세려니... 중간쯤의 붉은 실이 감긴 뼈에 이르기도 전에 갯수를 놓치고 만다. 시간은 흐르고 초조해지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

 

staire는 멋적은 얼굴로 '7'이라 쓰고 다음 문제로 향했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0423() 225029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1 : 의대 여학생들의 결혼

 

 

1. 들어가는 말

 

 

여기에 소개하는 내용들은 짐작하시겠지만  흔한 일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의대 여학생 또는 여자 졸업생들은 평범한 결혼 생활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의사로서 완성되기까지 투자된 시간과 교육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여학생들의 젊음... 이런 것들을 가볍게 여길 수 없음에도 결코 적다 할 수 없는 여학생들이 결혼을 위해 의사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있는 것은 온 사회가 같이 가슴아파해야 할 현상인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의대만큼 심각한지는 모르겠지만 공대 여학생들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해결책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합니다만...

 

그럼 결혼 후에도 전공을 포기하지 않았던 세 여의사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할까요...

 

 

2. 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

 

 

지금도 제 앨범에는 진석이 누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누나의 졸업식 사진입니다. 누나는 저보다 3년 위, 그러니까  예과 80학번이지요. 사진을 보며 늘 느끼는 것은 팔짱을 끼고 한껏 다정한 포즈를 잡았음에도 역시 연인 사이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 세련되고  지적인 멋이  넘치는 누나의  모습과 선머슴애같은 staire (당시 본 1을 마친 상태) 역시 '누나와 동생'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의대에서 진석이 누나는 인기 만점이었습니다.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미모와 우수한 성적, 밝고 사교적인 성격... 모든 면에서 의대 남자들을 혹하게 할 만한 분이었지요. 누나를 짝사랑하던 후배들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누나의 졸업이 다가올 즈음 의대생들은 누나의 부군이 될 행운아는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늘 궁금해 했습니다. 그러나 누나가 인턴을 마치고 병리학과 레지던트가 된 후에도 누나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누나께선 정릉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계시다고 하더군요. 아버님께서는 외국에 나가 계신 것인지 안 계신 것인지... 누나께선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니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요.

 

 

제가 공대생이 되던 해에 대학로에서 오랜만에 누나와 마주쳤습니다.

 

"민형이 너, 공대 갔대며?"

 

", 누나는 어떻게 지내세요?"

 

"난 결혼했어. 한 번 놀러와."

 

"그럴께요. 어딘데요?"

 

"혜화동 로터리에 '마술 가게' 알지? 거기야."

 

"? 그럼 누나는 카페 주인이세요?"

 

"내가 아니라 네 자형께서 주인이시다. 꼭 한 번 들러서 매상 좀 올려줘."

 

전 어리둥절할 수밖에요. 누나께서 카페 주인과 결혼했다니...

 

 

의대 동기 인호를 만나서 그간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누나께선 가수 김승덕씨와 결혼하신 거였습니다.

 

"이 결혼은 말도 안 돼.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

 

인호는 아주  비관적으로 생각하더군요. 누나께선  해부병리학 레지던트 과정을 밟으시는 중이며 김승덕씨는 가수, 작곡, 작사가로서 활동하는 한편 카페를 경영하고... 저로서도 어떻게 그런 결혼이 이루어졌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연이와 함께 마술 가게를 찾은 것은 그 다음주였습니다. 누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서빙을 하고 계셨습니다. 누나께선 연이를 퍽 귀여워하셨고 우리는 그날 저녁 따뜻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중간에 잠시 한가한 틈을 타서 누나께선 우리 테이블로 오셨습니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알아. 하지만 별 대단한 사연은 없어. 작년에 내가 외로움을 좀 탔었거든. 그래서 여기 와서 자주 시간을 보냈는데 그러다가 카페 주인을 알게 된거지 뭐."

 

"하지만 누나, 그저 외롭기 때문에... !"

 

누나는 땅콩 한 알을 튀겨 제 이마를 아프게 때리시고는 눈을 찡긋하며 다시 카운터로 가셨습니다.

                                                      

 

잠시 후 부군이신 김승덕씨께서 카페 가운데로 나오셨습니다 거기엔 작은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엔 귀한 손님 두 분이 와 계십니다. 저희들처럼 어렵게 결혼하려는 두사람을 위해 저희 부부가 같이 준비한 노래입니다..."

 

연이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고 손님들은 그 '귀한 손님'이 누구일까 하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렸습니다.

 

 

"흘러가는 하얀 구름 벗을 삼아서..."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남편과 함께 '내 사랑 그대 곁으로'를 부르시는 누나의 모습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3. 백마를 타고 온 왕자님

 

 

경이 누나(가명)는 무척 자상하신 분이었습니다. staire 1년 선배였죠. 아버님께선 한국 내과 학회의 실력자였으니 대단한 배경을 가지셨으면서도 누나께선 늘 우리를 편하게 대해주셨습니다.

 

 

누나께서 본과 2학년 때 (그러니까 staire는 본 1) 갑자기 결혼을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여름 방학 전까지만 해도 사귀는 사람 하나 없으시던 누나께서 2학기 개강을 하자마자 결혼이라니...

 

 

의대의 참새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얻은 결론은 '백마를 타고 온 왕자'였습니다. 여름 방학때 갑자기 혼담이 들어왔다더군요. 남편 되실 분은 미국에서 대학 학부를 마치시고 의대를 다니고 계신 본과 1학년생이었습니다. 나이로는 누나의 1년 연상이시고... 그렇지만 그 이상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나께서도 별로 아는 게 없으시다는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서로를 모르고도 결혼이 가능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애써 떨치고 누나의 결혼식장을 찾았습니다. 신부 대기실에서 뵌 누나는 아직 결혼하기엔 너무나 애띤모습이었습니다.

 

 

"누나. 지금 수업 빼먹고 오신 거죠?"

 

"민형이 너두 마찬가지잖아. 수업 빼먹은 건..."

 

경이 누나는 역시 신부 화장과 웨딩 드레스보다는 후배와 농담을 주고받는게 어울리시더군요.

 

 

식장은 의대 교수님들과 갖가지 의학 학회에서 보내온 꽃으로 가득 차 있어 이것이 예사로운 결혼식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신혼여행때문에 학교를 며칠 더 결석하신 후에 누나는 언제 그랬느냐는 얼굴로 학교로 돌아오셨습니다. 남편은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는 소식... 주말 부부가 아니라 '방학 부부'가 된 셈이죠. 그럼 약혼 정도로 충분할 텐데 왜 서둘러 결혼하신 걸까? staire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1년 남짓 지난 후 우리는 다시 너무나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경이 누나와 결혼한 그 사람은 알고보니 사기꾼이었다는 거죠. 의대생은 커녕 학부조차 다녔는지 의심스러운 건달이었습니다. 우리를 더욱 분개하도록 한 것은 방학때면 경이 누나를 찾아와서 돈을 뜯고 마구 때린다는... 소설에서나 나옴직한 일들이 경이 누나에게일어났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경이 누나는 이혼을 하셨고 지금은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셨습니다. 젊은 나이에 겪으신 커다란 시련에서 벗어나신 것인지 저로서는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 사건 이후 누나는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거든요...

 

 

4. 사랑이 꽃피는 나무

 

 

staire의 동기인 정연이는 과커플인 성주와 결혼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결혼했고 둘이는 함께 인턴 생활을 시작했지요. 부부 인턴... 뭐 그리 드문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자애들 중에서도 꽤 조그만 편인 정연이가 주부 인턴이라니...

 

 

그러나 우리가 걱정한 것은 단순히 정연이가 허약하다... 는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정연이는 약한 아이는 아니었고 인턴 일이 힘들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대개의 경우 누구나 그럭저럭 해낼 수 있는 것이니까요. 문제는 성주네 집안이 손이 귀하다는 것이었지요. 성주는 서울대 화학과 최규원 교수님(지금은 정년퇴임하신 명예교수님이시지만)께서 상당히 늦게 보신 외아들인지라 인턴 과정 중에 무리하게 임신을 했던 것입니다.

 

 

staire가 공대생이 되어 이들의 소식을 잊고 지내던 어느날, 우연히 TV에서 '사랑이 꽃피는 나무' 재방송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 방송된 내용은 인턴부부였던 여주인공(이름은 잊었습니다만)이 수술 도중에 쓰러져 유산을 하는 이야기.

 

 

staire는 긴장했습니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의 제작을 위해 서울 의대와 다른 몇몇 의대에 다니는 의대생들이 소재를 제공하는 리포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알고 있었거든요...

 

 

전화 한 통화로 간단히 모든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 내용이 방송되기 몇 주 전에 정연이가 격무에 쓰러져 유산을 했다는 우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정연이는 회복되었고 인턴을 마친 뒤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습니다아들이어서 다행이지, 딸이었으면 계속 낳을지 어쩔지 고민할 뻔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에게 '대를 잇는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며칠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습니다.

 

 

'의대'란 아직도 여학생들에게는 척박한 곳입니다. 여의사 지망생들은 언제쯤에나 이런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될까요?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0430() 021814 KST

제 목(Title): 의대 시리즈 12 : 선배의 눈물

 

 

시각, 가장 애닯은 감각...

 

볼 수 있으나 만질 수 없는 모든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 지이드 '지상의 양식'

 

 

그렇다. 볼 수 없다면 모를까, 눈 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중앙대 의대 내과학 교수... 누구라도 부러워하는 자리에 계시면서도 유병철 선배님은 늘 학생 시절을 그리워하셨다. staire와 나이 차가 10년 이상이면서도 늘 '병철이형'이라고 불러드리는 걸 좋아하셨고 우리와 함께 연주하는 걸 즐기셨다.

 

중앙대 의대에는 staire SNUMO(SNU Medical Orchestra) 선배 두 분이 계시다. 소아과 교수 응상이형(최응상 선배님)과 내과 교수 병철이형. 두 분 모두 졸업 후에도 악기를 놓지 않으시고 Doctors' Ensemble 단원으로 연주를 하셨다.

 

병철이형께선 원래 바이올린을 하셨으나 의대 졸업 후에 비올라가 더 맘에 든다며 악기를 바꾸셨다. 형의 두툼하고 깊은 소리를  듣고 있으면 형께서 연주하시는 브람스의 비올라 소나타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듣게 되기를 바라는... 

 

연습 막간에 잠시 들려주신 'Vocalise'도 잊혀지지 않는다.

 

 

의대 오케스트라에는 묘한 전통이 있다. 연주회 전날 마지막 연습을 마치면 반장이 마지막 전달 사항을 얘기한 후 꼭 덧붙인다.

 

"오늘밤에는 after가 없습니다. 일찍 들어가서 푹 쉬세요..."

 

그러나 그날 밤 대학로의 소주집에서는 최후의 만찬(?)이 벌어지고... 제정신으로 귀가하는 사람이 드물다. 매년 반복되는 거짓말... 한 달동안 마실 술을 그날 다 마시는거다. (이번 봄연주회 전날은 하필 만우절이라 더 혼란스러웠다. 반장은 '이번에는 정말이다. 제발 일찍 자라...'고 했지만 결국 대학로의 골목집에서 다들 만났다.)

 

 

그런데 staire가 본과 3학년이던 87년의 연주회는 바로 본과 3학년들의 시험날이었다. 그러니까 최후의 만찬... 은 시험 전날인 거다. 그래서 staire를 포함한 본3들은 슬쩍 달아나 시험공부할 작정들을 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선배는 한 수위... 병철이형을 비롯한 선배들께서 미리 짐작을 하시고 달아나려던 본3(악장, 반장 등 책임자들이 모두 본3이다)들을 모조리 체포(?)하신 거다.

 

 

"한심한 녀석들... 네놈들 같은 녀석들이 갈 데가 있지..."

 

우리는 벌써 뻐근히 취한 몸을 간신히 가누며 선배님들의 차에 나누어 타고 강남으로 압송되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잠원동 포장마차촌으로 우리를 데려가신 거다. (그땐 음주운전 단속도, 심야영업 제한도 없었다.) 병철이형은 차선을 무시하고 취중운전으로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셨고 (그게 다 니들 술 깨게 하려고 그런 거야... 하고 말씀하시지만...) 금호 터널을 지날 때는

 

", 큰일났다... 터널이 두 개로 보여..."

 

"그 터널은 원래 두개에요..."

 

"거짓말 하지 마. 나 아직 안취했어.. 두 개 사이로 가면 되는 거 아냐..."

 

정말 두 터널 사이로 돌진하시다가 하마터면 추모음악회를 만들 뻔 하시기도...

 

 

드디어 잠원동에 도착한 우리는 간판을 보고 쓰러질 뻔했다. 심장이 약한 종호는 잠시 거품을 물었다. 무슨 술집 이름들이 하나같이 '이판사판', '산수갑산', '싹쓸이'...

 

 

92년의 연주회 때는  병철이형과 응상이형께서 Mozart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Synfonia Concertante'  연주하셨고 광주 시향 지휘자이신  금노상 선생님께서 지휘를 맡으셨다. (금난새씨의 동생)

 

 

연주를 일주일 남짓 앞둔 어느날, 2, 3 after도 끝내고 남은 골수 술고래들 금노상 선생, 병철이형, staire, 당시 예과 2학년이던 석한이...) '요즘 학생들이 잘 가는  술집이 어디냐'는 형의 말씀에 따라 대학로의 골목집에서 곱창 전골에 소주를 마셨다. 금노상 선생, 아니 노상이 오빠(나이로는 병철이형보다 젊으시다)께서는 술이 약하기로 소문난 평소의 모습답지 않게 소주를 끝없이 따르셨고...

 

 

문득 어깨에 병철이형의 무겁지만 따스한 손길을 느낀 staire는 서둘러 잔을 비우고 형에게 잔을 드렸다.

 

"의대를 과감하게 떠난 네가 얼마나 부러운지 너는 모르지?"

 

노상이 오빠께서도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5년 전에 의대생으로서 뵌 이후로 뜸하나마 노상이 오빠의 술상무가 되어 드렸던 staire가 공대생이 되어 다시 술잔을 나누게 되다니... 금노상 선생으로서도 감회가 새로우신 거다.

 

그렇지만 당시 대학원 입시를 불과 두어 달 앞둔 공대 4학년의 staire로서는 형의부러움이 실감나지 않았다.

 

 

"의대 교수, 이건 못할 짓이야..."

 

취하셔서 음절이 불분명한 목소리로 병철이형이 말씀하셨다.

 

"임상 의사는 일에 몰두하면 되지. 하지만 교수는... 젊은 학생들, 얼마든지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너희들을 매일 보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학생들이 알까?"

 

"......"

 

"나도 한 때 너처럼 바꾸어볼 생각을 했지..."

 

"하지만 형은 다 이겨내셨잖아요..."

 

"그땐 이겨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인턴을 마치고 레지를 거쳐 군의관을 지나는 그 기간동안 늘 내겐 하기 싫은 일과 싸워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었어. 교수직을 따내는 순간 싸움은 끝났다고 믿었지만..."

                                                     

 

금노상 선생께서 다시 한 잔을 권했다.

 

"금선생,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오. 자신의 길에 일말의 회의도 없었다는 얘길 많이 들었지... 하지만 난 아니오. 바이올린을 비올라로 바꾼 것을 제외하면 난 언제나 하고 싶지 않은 걸 해야만 했어..."

 

 

형은 잔을 다시 staire에게 건네셨다.

 

"너도 내일 아침부터 쫓기는 생활을 시작하겠지만 나도 그래. 내일 아침에 봐야 할 환자가 몇 명인지 생각도 안나는군..."

 

형은 고개를 푹 숙이셨다. 석한이가 형을 부축하려는 순간 손을 내저으시며 하시던 잊지 못할 한마디...

 

"환자 보기 싫어..."

 

 

굵은 눈물이 형의 뺨위로 흘러내렸다. 40대의 당당한 교수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환자 보기 싫어...' 숙제 하기 싫어서, 피아노 학원에 가기 싫어서 징징대는 철부지마냥 '환자 보기 싫어...' 그래, 그럼 오늘은 쉬어라... 하고 응석을 받아줄 누가 있는 것도 아닌, 그저 공허하고 절망적인 '환자 보기 싫어...'

 

모든 것을 자신의 어깨로 떠받고 살아야 하며 가정에선 든든한 아버지로, 학교에선 존경받는 교수님으로, 병원에선 늠름한 의사로 늘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만 하는 중년 남자의, 누구 앞에서도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환자 보기 싫어...'

 

 

형께서 건강 문제로 휴직하셨다는  소식을 작년에 들었다. staire는 그것이 정말 건강 문제이기를 바랄 뿐이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0504() 213002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3 : 분만실에서

 

 

  ... 갓난아기의 빨간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아기의 이름을 June이라고 짓자...

 

                                      - 존 업다이크 '달려라 토끼'

 

 

1. 웬 파스를?

 

 

산모는 평범했다. 초산으로선 좀 많은 나이(32)였지만 요즘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다만 왠지 불안에 사로잡힌 얼굴... 불안해하지 않을 산모가 어디있을까마는...

 

 

대개 겁많은 산모라면 의료진에게 매달린다. 의사가 해결해줄 수 없는 것까지 호소하며 괴롭힌다. 의사로선 심리적으로 산모를 안정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인지라 또한 이런 응석(?)을 안받아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영미(가명)씨의 경우는 특이했다. 의료진에게 뭔가를 숨기고 싶은 듯한 눈치다. 초산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출산의 고통에 대한 공포와 불안보다는 오히려 의사나 간호사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staire가 이영미씨를 처음 본 것은 예정일이 이미 일주일쯤 지난 상태. 그러나 진통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진통 간격이 점점 밭아지는 것으로 보아 그날 밤을 넘기기 전에 낳게 될 것같았다.

 

 

이제 자궁경부가 열렸는지 확인할 시간이 되었다. 손가락으로 자궁경부를 훑어 벌어진 정도를 시간에 따라 기록해야 하는 거다. 산과의 환자복은 다른 병동과 달리 가운형이다. (다른 과에서는 남녀 구별없이 바지) 그런데 이영미씨는 그 가운자락을 단단히 감고 있었다. 가운을 벗기려고 (벗긴다기보다는 걷어올리는....) 손을 댔을 때 약간의 저항이 있었다. 수줍음 때문이 아니다. 이영미씨의  얼굴을 보는 순간 느꼈다. 이건 부끄러움이 아니야. 두려워하는 얼굴이야...

 

 

허벅지 안쪽 깊은 곳에 웬 커다란 파스가 한 장 붙어 있었다.

 

"이 파스는 뭡니까?"

 

"어릴 적에 ..화상을 입어서 흉이 졌거든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뭔가  걸리는 점이 있다. 이영미씨의 두려움은 저 파스와 무관하지 않을 거야...

 

 

김승욱 교수님께서는 화를 내지 않으신다.

 

"... 그래서, 강군은 그 파스를 어떻게 했나?"

 

"... 그냥 놔뒀죠..."

 

"그건 곤란한데... 산도를 오염시킬 만한 부착물은 미리 제거해야 하는 게 상식 아닌가?"

 

이만하면 김승욱 교수님으로서는 꽤 심하게 야단치시는 셈이다...

 

 

다시 대기실로 가서 이영미씨를 만났다.

 

"그 파스, 잠시 떼어야겠는데요..."

 

"꼭 그래야 하나요?"

 

이영미씨의 눈은 '제발...'하고 말하고 있었다. 이럴 땐 냉랭한 게 제일.

 

"시간이 없어요. 산도를 오염시킬 지도 모릅니다."

 

입술을 깨물고 한참을 망설이던 이영미씨가 드디어 무겁게 고개를 들었다.

 

"산실에는 몇명이나 들어와요?"

 

웬 엉뚱한 질문일까?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적게는 2, 많으면 4,5명입니다."

 

"..."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간다. 그렇다면... 이제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신뢰를 얻어내야 한다.

 

"이것 보세요. 우리는 하루에도 몇 건씩 분만을 치러내고 있어요. 전 분만장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언제라도 잊을 준비가 돼 있어요. 다른 선배 의사들도 마찬가지고요... 우리의 관심사는 산모와 아기의 건강입니다. 그밖의 것은 몰라요.."

 

"... 김박사님을 좀 뵙고 싶어요..."

 

김승욱 교수님과 이영미씨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갔을까? 하여간 10여분 후에는 파스를 떼어낼 수 있었다.

                                                     

 

짐작대로였다. 아니, 짐작보다 좀 심하다... 파스 아래의 살갗은 얼마나 오랫동안 덮여 있었는지 하얗고 오글쪼글한 잔주름투성이... 그리고 그 위에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담배불 자국으로 보이는 몇 개의 콩알만한 흉터와 '영미는 대철이가 XX...'를 비롯한 저질스러운 문신들...

 

 

여고 시절 폭행당한 흔적이라고 했다. 남편에게도 알릴 수 없었던... 파스를 갈아 붙일 때마다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이영미씨를 괴롭히던 상처...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났다. 아니,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이영미씨는 출산 직후 일반 외과 병실로 옮겨졌고 보호자와의 면회도 차단되었다.

 

'화상 흉터'의 제거 및 피부 이식 수술이 있었던 것이다.

 

 

아기를 안고 퇴원하는 이영미씨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지은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날로 잊혀졌다....

 

(staire의 글에서 가명은 본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이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산모의 나이를 비롯한 여러가지 배경들이 변조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2. 며느리는 남이다?

 

 

이것은 staire가 직접 겪은 분만이 아니다. 그때 staire는 분만장 실습을 하는 날이 아니었으니까...

 

 

분만장 앞을 지나다 우연히 눈에 띈 광경... 마스크를 벗으며 나오는 의사의 손을 부여잡고 매달린 남편의 모습으로 보건대 난산인 듯했다. 의사는 "좀더 두고 봐야..."라는 말만 되풀이했고 시부모 아니면 친정 부모들로 보이는 다른 보호자들도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 선배가 말했었다. 분만장에서 서성이는 할머니가 시어머니인지 친정 어머니인지는 난산일 때에만 구별할 수 있다고. '어떻게요?'하고 궁금해하는 staire에게 그 선배는 '직접  겪어보라'고만 하셨다. 별로 듣기에 좋은 얘기는 아니라면서...

 

 

과연 보호자중 한 할머니가 의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의사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한쪽 구석으로 가는 거다. staire는 그들을 슬슬 따라갔다. 병원의 특성상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은 주목을 받지 않는다. 흔하니까...

 

 

병동 끝에 있는 층계참에서 할머니는 백에서 뭔가를 꺼내 의사에게 건넸다. 돈봉투겠지? staire  방화문 뒤에 몸을 가리고 섰다. 그들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지만 나즈막한 목소리는 또렷이 들렸다. 역시 시어머니였다...

 

"선생님. 우리 집에는 손이 귀하거든요. 산모는 어떻게 되더라도 제발 아기만은 살릴 수 없을까요? 초음파 검사로는 아들이라던데..."

 

 

그날 저녁 staire는 산과 병동의 차트를 있는대로 뒤져보았다. 다행히 어느 산모나 아기도 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요즘도 그 할머니의 얼굴을 상상해보며 오싹하는 전율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겉보기에는 인자한 모습이었는데... '산모는 어떻게 되더라도...' 라고 말하는 순간의 할머니의 눈빛은 어떠했을까......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0518() 080220 KDT

제 목(Title): 의대 시리즈 14 : 공포의 베팅

 

 

하느님 아버지

여기 제가 왔습니다

숙제 끝낸 어린애처럼 이렇게 손들고 섰습니다

부디 영수증 하나 끊어주세요

 

                       -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베팅 - bedside teaching을 이렇게 부른다 - 이 항상 공포의 대상은 아니다. 환자한 사람을 선택해서 교수님으로부터 직접 임상 실기를 배우고 그동안의 수업 성과를 채점하는... 내과와 소아과의 필수 과정이다. 그렇지만 만일 담당교수가 최규완, 이정상, 방영주, 민경업, 고광욱, 홍창의, 안효섭... 선생님인 경우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오늘은 의대 시리즈 1편의 주인공 '재수 없는' 윤경이의 베팅날. 역시 운수가 사납다. 이정상 교수님께 걸렸으니...

 

 

이정상 교수님은 내과의 대표적인 냉혈한... 무시무시한 외모에 걸맞게 학생들을 사정없이 두들기시는 편이다. 신혼여행길에도 내과책 'Harrison'을 들고 가셨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하긴 해리슨(불어로는 아리송...)을 읽으시며 '아니... 이렇게 훌륭한 책이...'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는 다소 인간적인(?) 전설도 있긴 하지만...

 

 

첫 주에 최규완 교수님 베팅에서 늘씬하게 두들겨맞은 staire만이 느긋할 뿐, 실습생들은 분주하다. (최규완 교수님은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의 주치의를 지내신 꼬장꼬장한 양반... 이분의 베팅도 살기가 흐른다.) 윤경이 혼자서는 역부족이기에 온 실습조가 총동원되어 베팅 준비를 하는 거다. 재준이는 3시간 간격으로 환자의 혈압, 호흡수, 맥박수, 체온을 재어 정리하고 한성이는 차트를 요약, 노트한다. 윤경이는 주로 이론적인 질문을 받을 것에 대비, 교수님의 애독서인 '해리슨'을 며칠째 이잡듯이 뒤졌고...

 

 

드디어 약속시간... 멀리서 저승사자같은 구두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윤경이의 표정이 굳어진다. 교수님의 심기가 좀 불편하신 듯해서 병동은 긴장감에 휩싸인다. 교수님께서 staire를 보시는 순간 갑자기 표정이 험악해진다. (하긴... 원래 좀 험악하긴 하다.) 아침에 병동 복도에서 staire는 이정상 교수님과 마주쳤는데 먼발치에서 교수님께서는 staire를 민헌기 교수님 (이 분은 박대통령의 주치의셨다)으로 착각, 공손히 인사를 하시는 참사가 발생했던 거다...

 

 

애써 외면하는 staire를 잠시 노려보시던 교수님은 윤경이를 향해 차갑게 한 마디를 던지신다.

 

"발표 시작해..."

 

윤경이는 며칠밤을 새워 준비한 환자의 리포트를 읽어내려갔다. 여학생 특유의 섬세하고 치밀한 리포트... 이정상 교수님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으신 채 듣고 계셨다.

 

 

발표가 끝나자 갑자기 교수님이 일어서셨다.

 

"내과 실습생 치고는 의심스러울 정도로 치밀하군. 직접 관찰, 조사한거야?"

 

 

물론 아니지...  그 리포트를 위해 땀을 흘린 사람이 한둘이 아닌걸요...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윤경인 빵점이다.

 

"..."

 

자신없는 윤경이의 목소리... 교수님의 얼굴에 냉소가 스친다.

 

"그럼 어디 확인하러 가 볼까?"

 

에구... 이런 변고가... 윤경이는 책읽느라 바빠서 환자를 직접 보는 건 다른 애들이 거의 다 했는데... 다들 교수님 뒤를 따라 병실로 간다.

 

 

재수가 없으려니 하필 남자 6인실 환자다. 윤경이는 환자 얼굴도 가물가물할 텐데... 윤경이는 씩씩하게 한 환자의 침대로 걸어간다.

 

"김주용씨, 안녕하세요..."

 

"김주용씨는 저쪽인데요..."

 

으으... 끝장이군... 그러나 교수님은 태연하시다.

 

 

"혈압을 재봐..."

 

윤경이가 혈압대를 환자의 팔에 감았다. 그런데... 긴장해서인지 그만 거꾸로 감는거다. (거꾸로 감으면 에어 백에 공기를 넣을 때 혈압대가 벗겨져버린다.) staire가 재빨리 앞으로 나서서 혈압대를 고쳐 감았다.

 

"넌 가만있어!"

 

위협적인 교수님의 일갈... "가진 것 다 내놔..." 할 때와 같은 목소리... 이제 혈압대 아래에  청진기를 찔러넣을 차례... 그런데 윤경이는 청진기를 자꾸 넣었다 뺐다 한다. Krotokov sound(혈압대에 눌려졌던 피가 혈압대 밑을 벗어나며 turbulence를 일으키는 '부걱 부걱'하는 소리) 가 안 들려서 당황하고 있는 거다.

 

당연히 안들리지... 아직 혈압대에 공기를 넣지 않았으니...

 

"그냥 하면 돼..."

 

재헌이가 한마디 하다가 역시 교수님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혈압을 제대로 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음 순서로...

 

"Fundoscope... 볼 줄 알지?"

 

(Fundoscope 또는 ophthalmoscope : 망막을 들여다보는 장치. 환자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망막 동맥을 관찰할 수 있다.)

 

사실 본과 3학년 초반에 fundoscope를 제대로 볼 줄 아는 학생은 많지 않다. 볼 줄 모른다고 실토하는 게 좋을 텐데... 하지만 리포트엔 인턴 원태형 (소설가 박완서씨의 외아들. 레지던트 1년차때 자살하셨다...)이 대신 그려준 멋진 망막 스케치가 있으니...

 

 

윤경이는 환자의 오른쪽 눈에 fundoscope를 대고 자신의 오른쪽 눈을 갖다댄다.

 

그런데... 한성이가 병실 불을 끈다. staire는 커튼을 치고... 망막을 볼 때에는 조명을 낮추어야 하는데 윤경이가 또 깜빡한 거다.

 

"자네! 왜 자꾸 그래? 나가!"

 

에구... staire는 쫓겨나고 말았다...

 

 

병실 밖에서 족히 30분은 기다렸을 거다. 그동안 윤경이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병실을 나서는 윤경이의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을 보아 석연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교수님은 윤경이의 턱밑에 손가락 (엄청나게 길어요...)을 갖다대며

 

"도대체 실습을 뭘로 생각하는 거야..."

 

모두들 말이 없는 가운데...

 

"자네같은 의사는 필요 없어. 가운 벗어!"

 

버티면 안된다는 얘긴 선배들로부터 귀에 싹이 나도록 들었다. 윤경이의 가운을 빼앗듯이 받아든 교수님은 창문을 열고 밖으로 휙 던져버린다...

 

 

8층 높이에서 흐느적대며 떨어져 내리던 가운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는 윤경이...

 

교수님께선 뒤도 안 돌아보시고 돌아서서 병동을 나선다. 굳어 있던 애들이 윤경이 주위로 우르르 몰려든다.

 

"괜찮아... 다들 그러고도 졸업해서 의사 잘만 하던데 뭘..."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0528() 063435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5 : 필기가 문제라구요?

 

 

요즘 학생들, 너무 게을러.

내가 본과 다닐 땐 오른손으로 받아적고

왼손으로 그림 그렸는데...

 

                 - 서울 의대 박모 교수님의 말씀...

 

 

암기의 비중이 클수록 필기는 중요해진다. 생각은 나중에 하고 우선 신나게 받아쓰기에 바쁜 곳이 의대 강의실이다. (근데 나중에 생각을 할 틈이...)

 

요즘은 강의 교재를 교수님들께서 직접 제작하여 나누어주시기에 부담이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후배들을 보면 필기하느라 비명을 올린다. 더우기 교재라곤 거의 없이 모든 강의 내용을 필기해야 했던 staire 세대의 의대생들은...

 

 

믿거나 말거나...  staire가 악필이 된  이유는 절반은 노트 필기  때문이다. 하긴 staire가 우리 학년 3대 악필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설득력이 거의 없지만...

 

 

  1. 해부학

 

 

본과 1학년이 거쳐야 하는 가장 큰 난관이다. 차중익 교수님의  Head and Neck 강의는 수업 후의 '암호 맞추기'로 악명이 높다. OHP를 쓰시는데... 스크린에는 제목만 나열되어 있고 설명을 받아적을 틈이 없다. (제목만 다 써도 시간이 달랑 달랑하니...) 그래서 본과 1학년들은 팀워크의 위력을 이때 배운다. 3명 정도 팀을 이루어 한 명은 그림만 그리고 한 명은 필기. 한 명은 설명을 받아적는데... 수업 후에 세가지를 합쳐서 노트를 만드는 게 큰일이다. 실제로 어떤 팀(?)은 한 칸 어긋난 노트로 시험 공부하다 망한 역사가 있다. 제목 따로, 내용 따로, 그림 따로...

 

 

장가용 교수님의 복부 강의도 압권... 심한 날은 OHP 2개를 동원하실 때도 있고...애들이 그림 그리느라 설명을 안듣는 것같으면

 

"그거 그리면 뭐해. 책에 다 있는 그림인데..."

(이 말씀을 믿는 학생은 아무도 없다... 사실 그 ''이란 교수님께서 보시는, 우리가 모르는 책임에 틀림없으니까.)

 

 

(stomach)를 강의하시던  ... 교수님께선  검은 선으로  그려진 위장  그림을 OHP에 올리셨다. 윤곽뿐인... 그 다음엔 다른 필름을 한 장 겹친다. 붉은 색의 동맥 그림이 위의 윤곽과 겹쳐 나타난다. 그 다음엔 파랑색으로 그린 정맥 그림...

 

'... 그림이 좀 복잡해지는군...'

 

그다음엔 노랑색으로 그려 잘 보이지도 않는 자율신경계...

 

'... 이거 어떻게 공부하나... 선들이 다 겹쳤네...'

 

(선만 있는게 아니라 한 줄 한 줄 이름까지 붙어 있다.)

 

그러나 교수님의 칼라 필름은 아직 반도 넘게 남았다. 녹색으로 그린 임파계, 갈색의 위벽 근육 섬유 방향, 이름도 모를 우중충한 색의 위벽 소화샘 분포... 교수님께선 한 장 치우고 새것을 덮으면 끝이지만 학생들의 노트는 오색찬란한 추상화가 되어간다. (의대생들이 12색 볼펜이나 색연필을 애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생리학

 

 

생리학 교수님들께선 꽤 부지런하셔서 교재를 일찍부터 제작하셨다. 특히 김우겸교수님의 여유만만한 수업은 본과 1학년의 휴식시간이다.

 

"... 따라서... 이때... ( 3초의 침묵)...체내의... 소듐량이... 감소... 아니...... 그래... 감소하는데... (5)... 참으로... 이상하게도... (3)... 포타시움과... ... 뭐냐... 중탄산염은...

 

 

그 와중에 등장하는 실험동물은 빼놓지 않고 흑판에 그리시는데, 두루미가 나오던 날, 마치 화투장에 그려진 바로 그놈처럼 생긴 것을 정성껏 그리시는 거다.

 

"이녀석의 다리가... 그냥 긴 게 아니고... 얼음장 위에... 서 있을때... 발바닥은 0도지만... 허벅지는 (허벅지를 정말 탐스럽게 그리시며) 체온을... 유지하는데...그 비밀이 무엇인고하니..."

 

학생들은 하나라도 더 그리시게 하려고 마치 두루미를 처음 본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지금 생각하면 그정도 연세에, 좀 느려서 그렇지 정말 명강의였다고 생각된다.)

 

 

3. 조직학

 

 

백발이 성성한 장신요 교수님의 넘치는 정열이 강의실을 메운다. 어느 토요일, 4시간 연강을 맡으셨다. 강의실 문을 열자마자 강의가 시작된다.

 

"Fibroblast는 그 기원으로 볼 때..."

 

화들짝 놀란 애들이 서둘러 노트를 펼치는 동안 교수님의 강의는 총알처럼... 그러시면서 교단으로 걸어오시고, 강의 노트를 펼치시고... 그러나 강의는 1초도 끊어지지 않았다. 더우기 그때로부터 4시간동안... staire는 집에 가서 어깨를 찜질해야 했다.

 

 

4. 생화학

 

 

박상철 교수님의 강의는 종이 많이 잡아먹기로 소문이 나 있다. 우선 복잡한 화학구조식을 그린 후 애들이 '... 다 그렸다...'하는 순간 한 귀퉁이를 지우시고는 조금 변형시킨다. (예를 들면 OH COOH...) 도저히 다시 그릴 수가 없어 화학구조식의 몸체는 찐빵처럼 휙 그려치우고 바뀐 부분만 대충 표시한다. 이렇게 한시간을 보내고 나면 노트에는 찐빵이나 뭉게구름만 가득할 뿐 글자라곤 몇 개 없는 유치원생 노트가 되고 만다.

 

교수님께서 대사 과정을 강의하실 때에는 더욱 요주의... 복잡한 화살표와 관계된 효소 이름이 이리저리 가지를 뻗는데 주의할 점은 반드시 노트 중앙에서 그리기 시작해야 한다. 가지가 어디로 뻗을지는 교수님만 아시는 일이기에... 한귀퉁이에서 시작했다가 20가지 아미노산 대사과정을 반페이지에 다 그린 불행한 친구가 있었다. (결국 그 노트 보는 것을 포기하고 남의 노트를 복사하고 말았다.)

 

 

5. 미생물학

 

 

장우현 교수님의 강의는 항상 포카를 칠 때처럼 죄는 맛이 있다.

 

"Klebsiella... 이 균의 endotoxin 구조는 대장균의 그것과 같..........습니다."

 

같다는 거야, 다르다는 거야? 모든 학생들의 펜끝이 ''자에 멈춰 있다가 교수님의 끝마디를 듣고서야 일제히 책상에 펜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참았던 숨을 내쉰다.

 

"... 이 균은 100도에서 30분간 끓이면 죽...........습니다."

 

...

                                                    

 

최성배 교수님은 일명 Mister Jawetz. 야베츠 책을 그대로 복사해 오셔서 읽으신다.

 

학생들은 편한 자세로 앉아 책에 줄만 치면 된다. 복사기가 좀 시원치 않은지 가끔 더듬으시는데 이때는 앞자리의 학생이 책임지고 가르쳐드려야 한다. 진도가 늦으면 반드시 보강이 있으니까...

 

간혹 책에  없는 말씀을 하시더라도 긴장할 필요는 없다. Treponema pallidum(매독균) 강의 때 책에는 'dark field microscope로 관찰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다크 필드 마이크로스코프로 관찰할 수 있어요. 다크 필드 마이크로스코프가 뭐냐 하면... 균을 담은 슬라이드를 다크 필드 현미경 위에 놓고... 보는거에요..."

 

책에서 이 이상 벗어나셨던 예는 생각나지 않는다.

 

 

6. 약리학

 

 

성함은 잊었는데... 당시 조교였던 어느 분은 철자에 자신이 없으신 것도 아니면서 (우리가 노트와 책을 대조해 본 바로는 100% 정확함) 오른손에 분필, 왼손에 지우개를 들고 쓰시면서 슬슬 지우시는 거다. 도대체 짧지도 않은 약 이름을 3분지2 이상 흑판에 남겨두지 않으신다. 약리는 철자가 틀리면 감점이라는 설이 있어 학생들이 극도로 예민한데도... 'acetyl salicylic acid' 정도 길이의 약 이름을 쓰실 때면 아세틸... 은 벌써 지웠고, 살리실릭.... 은 몸으로 가리시고... 빤히 아는 acid만 보인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요게 바로 아스피린...)

 

 

왕년의 인기 DJ 박원웅씨의 형(동생?)이신 박찬웅 교수님께서 하루는 '이 부분은 필기할 필요 없다'고 하시며 무슨 약품의 제조 공정을 적으시는 거다. 적으라는 것도 다 못받아쓰는데... 다들 펜을 놓고 편한 마음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마침내 한 칠판을 가득 메우신 후에야...

 

"이건 암페타민의 제조법입니다. 아시죠? 히로뽕..."

 

... 그렇다면 저 제조법은 황금알을 낳는... 허겁지겁 펜을 들었으나 이미 교수님께서는 한 쪽 귀퉁이부터 지우고 계시다...

 

 

7. 필기의 달인들

 

 

의대생들의 필기 동작은 일견 일사불란해 보인다. 누구나 펜을 대여섯 개 이상 움켜쥐고 (색색으로... 같은 것을 2개씩... 왜냐면 펜을 떨어뜨렸을 경우 허리를 굽혀 주울 시간이 없기 때문에...) 약간 앞으로 굽힌 자세로 잔뜩 긴장해 있다.

 

'이 부분은 중요하다...'라는 말씀이 떨어지면 '딱딱딱딱...'소리가 강의실을 울린다. 12색 볼펜을 쓰는 애들이 색을 바꾸느라고...

 

', 이거 잘못 썼네... 철자가 틀렸어요...'라는 말씀 뒤엔 좀 둔탁한 '툭툭툭툭...' 200여개의 화이트를 일시에 흔드는 소리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빠짐없이 받아쓰는 '옵세'들이 있게 마련... 

 

옵세란 'Obsessive personality'의 준말인데... 필기든 공부든 유달리 집착해서 부지런떠는 애들을 약간 비꼬는 말이다.

 

(잠시 딴 얘기... 후배 중에 공부 안 하기로 유명한 녀석이 있는데... 어느날 그 녀석의 별명이 '건달'에서 옵세로 바뀐 걸 알았다. 후배들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 드디어 녀석이 마음을 잡았느냐고 물었더니... "그게 아니구요... 그애가 옵세라는 소리 한 번만 들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그러길래... 그렇게 불러주기로 했어요...")

 

 

잡담까지 받아적는 옵세가 있는가 하면 부지런히 (쓸데없는) 그림을 그려넣는 옵세, 시험에 나올 리 없는 "일설에는 이렇게 저렇게 주장하는 정신나간 학자가 있는데...난 개인적으론... 그런 거 안 믿어요..."라는 말씀까지 '일설에는 이렇게 저렇게 주장하는 정신나간 학자가 있음. 김용일 교수님은 개인적으로는 안 믿으심...'

 

이라고 쓰는 hyperobse까지 다양하다.

 

 

끝으로... staire의 여섯째 딸 지현이 이야기. 지현이는 글씨가 예쁘면서도 무지 빠르다. 그리고 중요한 곳에는 '폼폼'이라는 이름의 강아지 그림을 하나씩 그려두는 버릇이 있는데... 어느 후배가 전하는 이야기,

 

"제가 반도 못 받아쓰고는... 할 수 없이 옆자리의 지현이 노트를 넘겨다 봤더니... 그새 다 받아쓰고 벌써 폼폼이를 그리고 있더라구요. 그것도 3마리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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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