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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01일(수) 07시45분03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6 : 의대생의 사랑
그에게서는 늘 비누 냄새가 났다...
- 강신재, '젊은 느티나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맺어지게 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하고 오랜 시간을 요하는지 나는 모른다. 에반젤린처럼 평생을 쫓아가기만 하는 경우도 있으니... 그런 면에서 본다면 만 4년이 걸린 어느 의대생 커플의 경우는 오히려 행복한 편에 속하는 걸까?
staire가 점을 치기 시작한 지 7년째를 맞던 90년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경희(가명)는 밝았다. 한 마디로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의예과 90 학번 신입생 중에 돋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늘 없는 그애에게 호감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다. 집이 유복한 탓에 그렇다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일 지도 모르지만...
경희는 SNUMO에 가입했고 4월 들어서부터는 제 키만한 첼로를 메고 다니기 시작했다.
정현이(가명)는 무거웠다. 어두웠다고 해도 좋다. 같은 90 학번 신입생이면서도
다른 애들보다 두어 살 더 들어보이는, 글씨가 참 멋있을 듯하고 눈길이 서늘한 녀석이었다. 정현이는 어릴 때부터 다루던 바이올린을 들고 남들보다 좀 늦게, 5월에야 SNUMO에 들어왔다.
이들이 어떤 식으로 1년을 보냈는지 staire로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90 학번 신입생은 자그마치 28명이었고 요란스러웠다. 정현이와 단둘이 소주집을 찾은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가을이 지나며 경희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지만 그게 무어 대단한 뉴스도 아니고...
생각해보면 그들과의 의미 있는 첫 만남은 1년이 지난 SNUMO 겨울 캠프부터였다.
캠프 마지막 날 저녁, (SNUMO 겨울 캠프는 졸업생 환송회를 겸한 훈훈한 자리가 마련된다) staire는 1년 후배들의 졸업을 보고 모처럼 감상에 젖어 꽤 마셨다.
많이 취한 상태에서 누가 staire 앞에 다가와서 앉는 걸 알았다. 경희였다.
"한 잔 주시겠어요?"
경희는 소주를 생각보다 잘 마셨다. 전에 알던, 그저 가볍기만 하던 모습이 아니다.
이제는 좀 성숙한, 즐거움과 함께 아픔도 알아버린 그런 얼굴...
"점을 치러 왔구나?"
"예, 해주실 수 있어요?"
"글쎄, 난 지금 좀 취해서... 아마 제대로 칠 수 없을 텐데..."
"부탁해요..."
그래서... staire는 경희와 함께 조용한 빈 방을 찾았다. 악보와 악기, 보면대가 어지럽게 널린, 연습실로 쓰던 작은 방. 펼쳐진 악보는 보로딘의 현악 4중주 2번...
물론 취해서 보는 점이 잘 될 리가 없고 staire는 카드를 노려보며 무척 많은 땀을 흘렸다. 클로버 퀸.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걸까? 경희의 얼굴을 바라보다 staire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니야. 경희의 모습에서 느껴진다. 아무리 취했다지만 그런 문제일 리 없다는 것... 그렇다면 이건 staire가 점장이 생활 8년만에 처음 만난 'stop signal'이다.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틀린 점괘. 그런 경우엔 점을 다음 기회로 보류해야 하는 거다...
"경희야, 이건 stop signal이야. 더 이상 점을 진행할 수 없다는 일종의 경고와 같은..."
"그럼 어떻게 해요?"
"캠프 마치고... 서울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겠니? 그때 다시 처음부터..."
그러나 서울에서 경희를 쉽게 만날 수 없었고 시간은 흘러 5월이 되어서야 공대식당에서 경희와 마주 앉을 수 있었다.
경희와 지난 가을부터 소문이 있던 같은 학년의 혁이(가명). SNUMO는 아니지만 인사성이 밝아 staire도 웬만큼 아는 녀석... 두 사람의 패는 밝지 못했다. 혁이에게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경희의 부모님께선 결코 이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으실 거다. 그리고 경희는 그걸 뛰어넘을 만큼 용감하지 못하다...
"혁이는 가난해요. 그게 그렇게 큰 문제인 줄은 몰랐어요."
이들은 어느 새 결혼까지 생각하게 된 거다. 그리고... 물론 결혼은 소꿉장난이 아니다.
"이런 여건에서도 맺어질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아무리 패를 읽고 또 읽어도, 최대한 좋게 봐 주려 해도...
"1%도 안되겠는걸..."
경희는 눈물을 흘렸다. 언제나와 같은 담담한 표정에 아무런 구김 없이 무표정하게 흘러내리는 눈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헤어질까요?"
이쯤 되면 이미 점의 단계가 아니다. staire는 카드를 한편으로 밀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이렇게 계속되다가 결국 떠밀려서 헤어진다면 상처가 더 크겠지요..."
"그래서... 헤어지고 싶어?"
경희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헤어져야겠지요. 한 일주일 울면 될까요? 아니면 한 달?"
staire는 마음 속으로 경희의 부모님께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그럼 헤어지지 마. 헤어지자고 다짐은 몇 번이든 할 수 있겠지만 넌 지금 그애와 헤어질 수 없어... 네가 원하는대로 해. 언젠가 네 말대로 떠밀려 헤어질망정 미리 겁먹고 물러서지는 마. 지금 너희들의 사랑은 그렇게 마음대로 맺고 끊을 단계를 넘어섰어... 물론 너희들이 끝까지 지금의 감정을 지켜나갈 수 있다면 언젠가 커다란 벽에 부딛히겠지. 그건 그 때의 문제야... 그보다는 네가 이런 어려운 가운데 너의 사랑을 얼마나 결연히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봐. 넌 아직 어려. 부모님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너희들의 사랑이란 언제 깨어질 지 모르는 약한 거야."
경희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났다... 말없는 부정의 빛...
"그렇게 생각하니? 결코 변하지 않을거라고? 그렇다면 물러서지 마. 본과를 가게 되고 공부에 시달리고 세상을, 그리고 인생을 보는 눈이 더 깊어지면 아마 다시 오늘과 같은 선택의 순간이 올거야. 그 때가 되면 스스로 선택하는거야. 스스로... 지금 물러서면 언제까지나 후회만이 남을 거야...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잃은 것에 대한 아쉬움과 아픔이 얼마나 큰 지 안다면 물러서서는 안 돼..."
경희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여자애들의 얼굴이란 얼마나 불가사의한 것일까?
눈물자위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이 저렇게 밝을 수 있다니...
"고마왔어요. 전 해낼 거에요..."
경희를 보내고 담배 한 대를 꺼내어 물었을 때 멀리서 정현이의 옆모습을 발견했다. 점치는 걸 보고 있었을까?
(계속)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03일(금) 05시51분46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6.1 : 의대생의 사랑
J'ai tant reve de toi que tu perds ta realite...
(내가 당신을 너무나 꿈꾸었기에 당신은 현실성을 잃었다...)
- 데스노스
(前承)
91년 봄의 SNUMO 예과 MT, staire는 아직껏 예과 MT에 빠진 적이 없다. 경희도 정현이도 같이 떠난 MT에서 staire는 경희에게 '바다의 선물'을 한 권 선사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또는 감사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주는 1000원짜리 책...
경희는 딸은 아니었지만 staire는 경희를 스머페트라고 불렀고 경희는 staire를 파파라고 불렀다. 결국은 7번째 딸로 정식 입적되었지만...
저녁에 모든 프로그램(음악 퀴즈, 게임...)이 끝나고 이제는 2학년이 된 정현이와 귀여운 신입생 영미가 잠시 물가에 같이 나갔다 돌아온 것을 staire는 놓치지 않았다. 잘 어울리는군... staire는 미소를 머금으며 둘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방으로 돌아왔다. 신입생과 2학년 선배의 술대결이 시작되었다. 여학생들은 옆방에서 여학생들끼리의 술자리를 마련했고... 드라이 진(원샷하기엔 좀 부담스러운 술이다)을 큰컵으로 한잔씩 돌린 후 본격적인 술고문...
그런데 정현이가 갑자기 옆으로 쓰러지더니 벽을 주먹으로 힘껏 때린다. 둔탁한 쿵 소리를 듣고 많이 다쳤음을 직감했다. 손을 주물러보니 뼈에는 이상이 없지만 아침이면 퉁퉁 부을 게 틀림없다. 잠시 영미의 모습이 스쳤다. 행복하기만 하던 둘의 모습... 무엇이 정현이를 저렇도록 폭발시킨 걸까?
정현이가 진정되고 나서 자리를 합쳤다. (옆방에서 여학생들이 들어왔다.)
경희가 staire 옆으로 왔다.
"넌 항상 취해서 가물가물할 때 오는군..."
"오빠는 그때가 편해요... 오빤 취해도 잘 보살펴 주시잖아요... 편해요..."
"그런가... 난 솔직이 너를 보면서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는데..."
"알아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게 좋은 걸요..."
무슨 얘길 했는지 잘 기억은 안나지만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staire는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아침... 눈을 뜬 staire는 좀 놀랐다. 경희의 얼굴에 눈물자국이 남아 있다.
"남자애들이랑 좀 싸웠어요... 제가 첼로 파트장이 될 수 없대요..."
경희는 누구보다도 연습을 열심히 했고 후배들에게도 정성을 많이 기울이는데...
여자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거겠지. SNUMO는 보수적인 의대의 풍토를 그대로 반영한듯 여자 반장이나 악장은 커녕, 여자 파트장도 드물다...
경희를 위로해주느라 정현이에게 신경도 못쓰다가... MT 마치고 정현이와 맥주집을 찾았다.
"어젯밤엔 왜 그랬니? 영미 때문에?"
"형, 보셨어요?"
"..."
"사실은, 영미가 제게 그랬어요...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그런데 왜?"
"실은... 전 경희를..."
음... 점을 치다 보면 제일 괴로운 게 이런 경우다. 점장이는 자신이 친 점에 대해 입을 닫아야 하고... 그래서 가끔 녀석들의 어긋난 모습을 발견하는 거다.
"하지만 경희에겐 혁이가 있잖아..."
"혁이보다 제가 먼저에요... 작년 3월에... 새벽에 28동 앞을 지나는 경희를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희미한 햇살에 반쯤 비낀 옆모습..."
"하지만 그것뿐이잖아..."
"예... 저 혼자만의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늘 경희의 옆모습이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렇지만... 그건 이유가 안된다. 경희도, 정현이도 staire가 무척 아끼는 후배...
둘이 참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을 새삼스럽게 해봤지만...
"그건 안 돼. 우선 영미에게 잔인한 짓이고, 넌 이미 혁이에게 졌어. 그건 인정해야지... "
"알아요. 그래서... 너무 답답해서..."
정현이에게 그 점의 결과를 말해주고 싶었다. 경희와 혁이는 반드시 헤어지고 말 거라는... 좀더 기다리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점장이의 입은 무거워야 한다...
가을, 예과생들이 연주회를 준비하는 기간이다. 은영이, 석한이, 현승이, 경희는 한 팀이 되어 곡을 고르고 있었다. 악기 실력들이 꽤 있는 애들이라 staire는 슈만의 현악 4중주 2번을 추천했다. 정현이는 영미와 한 팀이 되어 하이든의 세레나데를...
혁이는 경희네 슈만 팀 연습에 빠짐없이 들어와 악보를 넘겨주기도 하고 잔심부름도 하며 주위를 돌았다. SNUMO 후배는 아니지만 멋진 녀석... 음악이 돈 많은 이들만의 것이 아니란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혁이의 감각은 예민해서 연습 지도를 하던 staire를 머쓱하게 하기도 했다.
언제나처럼 슈만을 연습하다가 제 1 바이올린 은영이가 수업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한 번 해볼까?"
staire는 갑자기 슈만을 직접 연주해보고 싶어진 거다. 예과 시절에 연습한 적이 있는 곡이니 초견으로 될 지도 모른다...
은영이의 악기는 좀 작고 가벼웠지만 4사람은 곧 슈만의 선물을 맛보기 시작했다.
제 2 바이올린 석한이의 풍부한 저음, 비올라 현승이의 무게 있는 솔로... 경희의 신비롭게 울리는 첼로의 아르페지오를 타고 흐르는 staire의 선율... '오르페우스의 창'에 나오는 다비드, 라마핀, 크라우스의 현악 4중주가 (나머지 한 사람의 이름은 소개되지 않았다) 세바스찬 음악학교의 연습실을 울리듯 저녁 햇살이 비쳐드는 음대 연습실에서 5사람은 음악에 빠져들어갔다...
그렇지만... 경희의 뒷모습과 손놀림을 멍하니 바라보는 혁이의 부러운듯한 눈길...
그리고 이 자리에 staire가 아닌 정현이가 앉아 제 1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면...
그런 생각으로 음악은 조금 흐트러졌다. 아주 조금... 경희의 눈빛이 staire를 향했다. 약간 바쁘게 경희가 새기는 저음 박자에 다시 몸을 실은 staire... 안정을 되찾고 시원스럽게 긋는 경희의 오른팔... 경희의 옆모습은 사랑스러웠다. 가슴아프도록... 믿음과 사랑... 그것이 빠진 연주는 앙상블이 되지 않는다.
4사람은 서로의 눈길을 나누며 연주에 깊이 잠겨들었다...
(계속)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05일(일) 03시46분21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6.3 : 의대생의 사랑
Ignotum per ignotius...
(알 수 없는 것을 더욱 알 수 없는 말로 설명하다...)
- Thomas Aquinas
본과 1학년 여름을 맞은 경희의 편지를 받았다.
"상처를 입었습니다. 한 달쯤 전에 떨어진 커다란 바위가 아직도 비직비직 저를 아프게 합니다..."
본과 생활에 쫓기던 경희와 혁이가 위기를 맞았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위로의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정현이를 생각한 것인가? staire는 점장이의 선을 넘고 있었다...
가을쯤에 정현이마저 영미와 좋지 않은 결말을 보았다. staire의 딸이 되기를 거부했던 유일한 아이 영미...
겨울 캠프, staire의 졸업생 환송회가 있는 캠프였다. staire는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주 악보를 몇 개 들고 캠프를 떠났다.
캠프 첫날밤. 경희를 만났다. 혁이와 어떻게 되었다는 얘기는 없었지만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의대생의 사랑... 그것은 몇가지 단계가 있어. 대개들 그 틀에 놀랍도록 잘 맞아 떨어지지. 우선 예과의 평범한 시기. 이 때의 사랑은 다른 과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그렇지만 본과에 올라가며 많은 변화를 겪게 되지... 우선 본과 진입 직후의 혼란기. 공부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정리하기도 하고 그동안 숨겨졌던 커플들이 좁아진 캠퍼스로 인해 일제히 공개되는..."
"맞아요. 우리 학년들도 그랬어요."
"그 다음엔 본과 1학년 중반의 위기... 과도한 스트레스에 서로를 감싸줄 여유들을 잃어 가는 시기... 많은 커플들이 이때 깨어지는 거야."
"그것도 맞아요..."
경희의 얼굴에 쓸쓸한 그림자가 스친다...
"그다음은 본과 2,3학년의 free radical reaction phase... 무수한 커플들의 anastomosis(의대생들은 다 아는 단어... '이합집산')가 일어나는데... 잘 살펴보면 깨어진 커플들의 '조각'들이 멀쩡하게 공부 잘 하던 안정된 분자들을 때리며 반응이 일어나는..."
경희는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부터는 경희도 잘 모르는 얘기인 것이다...
"그리고 본과 3학년 후반의 성숙기. 남자애들은 의사와 결혼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시기인데 대부분 '편한 마누라'를 원하기 때문에 과 여학생들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식어가지. 반대로 여학생들은 자신을 이해해줄 남자는 의사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고... "
"음... 전 그럼 의사와 결혼해야겠네요. 제 야망은 두가지에요. 야망... 이라기엔 좀 우습지만요... 하나는 의사가 되는 것, 또 하나는 엄마가 되는 것..."
"마지막으로 4학년때의 결혼 붐이지. 수많은 과커플들의 결혼이 이루어지는데 대체로 원래 사귀던 애들이 아닌 새로 이루어진 커플들..."
곁에 앉았던 예과생 성욱이가 뜻모르는 웃음을 지었다...
졸업생 환송회는 저녁 8시부터 시작되었다. 그전에 정현이를 만나 이중주 악보를 전해 주었다.
본과 4학년들의 순서가 하나하나 지나가고 마침내 공대 4학년 staire의 차례...
딱 10년에 걸친 학부생으로서의 SNUMO 생활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본과 1학년들이 한사람씩 졸업생의 프로필을 소개하고 선물을 전한다. staire에게 선물을 전하는 역할을 맡은 것은 경희였다.
"작년, 재작년에도 졸업하시는 선배님들을 떠나보냈지만 이 분의 졸업을 맞아 저는 처음으로 선배를 잃는다는 느낌에 가슴이 아파오는 걸 느낍니다. 인자한 아버지였고 늠름한 선배이셨죠..."
아니... 이런 과찬의 말씀(?)을... 경희는 고개를 숙이고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그동안 저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 수학, 물리, 유기화학, 물리화학,해부학, 병리학, 마이티(?), 화성법과 실내악, 그리고 푸가의 아름다움... 강민형 선배님의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경희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선물을 전달받으며 경희와의 악수... 손이 차갑다. 그렇지만 경희는 내 손에서 따스함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며 손을 꼬옥 쥐어주었다. 그리고 귓속말...
"정현이에게 가 봐... 재미있는 악보가 있어..."
떠나는 자리에서의 마지막 인사...
"전 너무나 오랫동안 대학생이었어요. 이제는 학생이 아닌 저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랜 기간이었지요.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학생으로 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불현듯 4년 전의 이 자리가 떠오른다. 공대 신입생이 된 staire가 왔던 연이와의 겨울 캠프. 졸업하는 동기들을 축하해주러 왔다가 뜻밖에 같이 환송을 받았다.
내 감사패는 따로 주문해서 만든 것으로 다른 애들의 것에 '선배님의 졸업을 축하드리며...'라고 되어 있는 데에 비해 내것에는 '선배님의 새출발을 축하드리며...'
라고 씌어 있었지...
선배가 어떻고 음악이 어떻고... 하는 실없는 얘기를 하다가 그만 목이 메었다...
"...저는 여러분을 잊지 못할 거에요. 아니, 여러분 곁을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왜냐 하면..."
그날 밤, 작은 연습실에서 경희와 정현이가 머리를 맞대고 이중주를 연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끝)
* 덧붙임 : 이 글이 처음 씌어진 94년 6월로부터 20개월이 지난 금년 2월, 본과를 졸업하며 경희와 정현이는 결혼했습니다. *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07일(화) 06시09분04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7 : 81 병동의 거머리
O let me be awake, my God!
Or let me sleep alway.
- Coleridge,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에서
연휴를 맞아 꼬박 이틀 반을 철야하며 수없이 이런 기도라도 올리고 싶었다. 나를 깨워주소서. 그게 안된다면 차라리 영영 잠들게 하소서... 본과 3학년이던 어느날, 잠에 취해 저질렀던 어이없는 실수의 기억과 함께...
손가락 끝의 감각이 꽤 예민한 편인지 혈관을 찾아 찌르는 데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한 것은 실습 1주일만이었다. 처음엔 빤히 보이는 혈관도 잘 못찌른다. 그러나 연습을 거듭하다보면 차차 감각이 붙는다. 잘 안보이는 혈관도 느낌만으로 찔러 들어가게 되고, 주사바늘 끝에서 미끄러져 달아나는 혈관을 쫓아가 찌르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데에는 1달이면 충분하다. 근데 staire는 불과 일주일만에 그 단계에 도달한 거다.
이제 실습생이 맡은 채혈과 정맥주사는 대부분 staire가 처리하게 되었다. 아침 6시까지 출근(?)해서 간호사들이 챙겨둔 order에 따라 졸린 눈을 비비며 시험관과 주사기를 들고 병실을 돌며 채혈... 8시 수업을 마치고 9시반에 병동에 올라와 다시 병실을 돌며 정맥주사... 인턴의 총애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건 원래 인턴의 일이거든.
어느샌가 staire는 '81 병동의 거머리'라 불리게 되었다. 처음엔 흡혈귀... 였지만 간호사들은 거머리라는 별명이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피뽑는 일을 도맡아 한다는 뜻이다...
staire가 특히 즐겨 쓰는 기술은 동맥 찌르기... 원래 채혈은 정맥에서 한다.
그러나 ABGA (Arterial Blood Gas Analysis : 동맥혈 가스 분석)를 위해 동맥혈을 뽑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동맥 속의 산소, 이산화탄소, 중탄산염 등을 측정하기 위해서... 손에 익으면 정맥 찌르기보다 보다 쉽기 때문에 정맥을 찌르기 어려운 환자의 채혈을 위해 ABGA가 아닌 경우에도 가끔 쓴다...
그날 아침에도 staire는 졸음을 참으며 채혈을 하고 있었다. 우선 간염 환자의 정맥 채혈... 대개 cubital fossa(팔꿈치 앞쪽의 오목한 부분)에서 뽑는다. 환자는 온 몸이 퉁퉁 부어 있어 정맥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staire는 살짝 비치는 가느다란 정맥 줄기를 발견하고 고무줄을 감았다. 고무줄의 압력으로 인해 정맥혈이 심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맥에 고이면 좀더 찌르기 쉬워진다. staire가 시키는 대로 환자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근육이 수축하며 앞팔에 남은 정맥혈을 짜 주면 정맥은 좀더 부풀어오른다. 그래도 여전히 희미한 정맥... 손으로 더듬어 보았지만 혈관의 부피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괜찮아... 이건 충분히 찌를 수 있어... staire는 주사바늘을 눕혀 환자의 팔을 찌른다. 꿈틀하며 바늘 옆으로 미끄러져 달아나는 혈관의 감촉... 이제는 눈으로 볼 필요가 없다. 손감각만으로 해야 한다. 바늘을 약간 후퇴시켰다가 다시 밀어넣는다. 오른손으로 (staire는 왼손잡이) 혈관이 지나는 부분을 당겨 미끄러지는 걸 최대한 막으며 바늘 끝이 혈관 벽을 긁는 걸 느낀다. 주사기 끝에 빨갛게 피가 비친다. 성공! 고무줄을 풀고 피스톤을 슬슬 당기며 피를 빨아들인다. 필요한 3cc를 다 뽑고나서 솜을 대고 누르며 바늘을 뺀다.
"문지르지 마시고 솜으로 꼭 누르세요... 문지르면 피멍이 맺힙니다..."
습관이 돼버린 말을 중얼거리며 피를 시험관에 옮겨담는다...
다음 환자는 ABGA. 이것도 반복하다보니 과정을 다 외어버렸다. 우선 주사기와 시험관용 고무 마개를 준비한다. 고무줄은 필요없다. 환자의 손목을 더듬으며 맥박을 잡아낸다. 동맥을 찾는 거다. 일단 찾은 동맥을 아래위로 더듬으며 동맥의 진행 방향을 확인한다. 동맥은 정맥과 달리 비교적 곧게 뻗어 있어 쉽게 방향이 잡힌다. 그 다음엔 바늘을 수직으로 세워 단숨에 찔러넣는다. 물론 눈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동맥이 눈에 보이는 경우란 동맥경화증 환자의 관자놀이나 귀 앞 같은 곳뿐이다) 손끝에 느껴지는 맥박의 위치로 잡아내는 거다. 주사기 끝에 피가 비친다. 동맥은 혈압이 정맥보다 높아 힘주어 당기지 않아도 쉽게 빨아낼 수 있다.
"솜은 문지르지 말고 가만히 누르세요. 적어도 5분동안..."
정맥보다 오래 누르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 솜을 대고 누르며 바늘을 뽑는다.
즉시 고무 마개를 주사기로 찌른다. 동맥혈의 산소 함량을 측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깥 공기와 닿지 않도록 하는 거다. 반창고에 환자의 이름과 날짜를 써서 붙이고 냉장고에 넣는 것으로 끝... 냉장고에 넣는 이유는 적혈구 등 세포들의 대사과정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적혈구들이 계속 산소를 소모하거든...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최성재 교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이런 아침 시간에 올라오시는 건 드문 일인데...
교수님은 scleroderma(공피증) 환자를 보러 오신 거다. 그건 좀 드문 병인데...
온몸의 혈관과 결합조직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대책없는 병이다. 오늘 아침 용태가 급격히 나빠져 올라오셨다고 하는 얘기를 들으며 병실로 들어갔다.
환자는 40대 중반의 아주머니... 갈 데까지 간 것같았다. 손가락 끝의 혈관들이 막혔는지 손끝이 거무스레 죽어 있었고 피부는 두툼하게 부풀어 흡사 살색 가죽장갑이라도 낀 것같다...
"우선 혈액을 좀... 빨리!"
교수님의 지시에 따라 인턴이 혈관을 찾는다. 그러나...
"혈관이 다 막힌 것같아요. 잡히질 않는데요..."
잠시 모두들 당황했다. 그때,
"야, 거머리. 네가 해 봐."
주치의의 목소리에 문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던 staire가 놀라 정신을 차렸다.
"자네가 81병동 거머린가? 해 보게..."
교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안 할 수도 없다...
환자의 피부는 코끼리의 그것처럼 거칠고 두꺼웠다. 정맥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staire는 환자의 손목을 힘주어 쥐고 맥을 찾았다. 동맥을 찾는 거다.
교수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녀석 좀 보게... 하는 표정.
희미하지만 분명히 맥이 잡힌다. 보통때보다 좀 가는 24호 바늘(번호가 높을수록 가늘다. 보통의 채혈은 18 - 21호로 한다. 헌혈할 때 쓰는 굵은 바늘은 대개 13 - 16호)로 힘주어 찌른다. 수축된 혈관이라 가는 바늘을 택한 거다. 평소보다 좀더 세게 찌른다... 됐어! 검붉은 피가 빨려나온다. 동맥혈인데도 검붉다는 건 산소 함량이 심하게 떨어졌다는 뜻이겠지... 과연 다급한 상황이었군...
staire는 피를 시험관에 옮겨담고 가운 윗주머니의 펜꽂이에 단단히 꽂았다. 이마에 땀이 비오듯 흐르는 걸 그때서야 느꼈다...
"잘했어. 과연 거머리야..."
긴장이 풀리며 졸음이 다시 밀려왔다... 그때... 멍청한 staire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솜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갑자기 왜 그랬을까? 바보같이...
윗주머니에 꽂아둔 시험관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staire의 가운 앞자락을 적시며 병실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피...놀란 교수님과 주치의, 인턴, 환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staire는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말았다...
"허허... 저 거머리는 뽑는 것만 잘하는군..."
교수님께선 웃으시며 익숙한 솜씨로 금방 다시 피를 뽑으셨다. 그것도 정맥에서...
어떻게 정맥 채혈이 가능할까? 저런 분 앞에서 얕은 재주를 뽐내려 했으니...
병동은 다시 분주해졌으나 가운을 입은 채 병실 바닥에 주저앉은 staire는 한동안 일어날 수가 없었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18일(토) 10시19분50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8 : 걸렸군...
하나의 개념, 하나의 형상, 하나의 존재가
푸른 하늘로부터 진흙투성이의 납빛 지옥의 강에 떨어진다.
그곳에서는 하늘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 보들레르, '축복' (시집 '악의 꽃'에서)
악몽인가... staire는 소스라쳐 눈을 떴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이마가, 아니 온 얼굴, 온몸이 펄펄 끓는 듯하다. 비틀거리며 간신히 베갯머리에서 기어나와 서랍을 열었다. 뒤적뒤적... 체온계를 찾았다. 체온은 자그마치 40도 8부.
열을 조금이라도 식혀보려고 맨바닥에 누워서 생각해본다. 이상한 것을 먹지는 않았고... 그래... 이건 사나흘 전부터 앓던 가벼운 감기 때문이야. 그런데 정체가 뭐지? 대개 어떤 병이든 초기 증상은 감기 비슷한 법이니... 좀더 앞으로 거슬러 가며 감기로 시작되는 병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열에 뜬 머리로는 잘 안되지만...
앗...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불길한...
staire는 억지로 몸을 추슬러 일어나 내과책을 꺼내어 장티푸스(typhoid fever)를 펼친다.
'초기 증상 : 가벼운 감기, 피로감, 식욕부진, 두통, 오한과 열...'
음... 이건 도움이 안된다. 대개의 병이 다 이렇지... 그렇지만 장티푸스가 아니라는 확증은 없다.
'잠복기 : 약 1주일'
일주일? 가만있자, 일주일... 그렇군. 일주일 전이면 지난 주 수요일, 아니 목요일인가... 하여간 '전염병동' 실습중이었던 그 시기... 그때 staire가 담당한 환자는... 으으으... 장티푸스다.
'주요 증상 : 8주 이상 지속될 수 있는 고열(39-40도)이 무엇보다 특징적이다. 그리고 서맥(bradycardia : 맥박이 늦어짐)...'
시계를 꺼내어 맥을 짚는다. 어지럼증이 심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서맥은 아니야... 그럼 그렇지...
그러나...
'서맥을 보이는 환자는 전체의 30 내지 40%에 불과하다.'
으으... 얄밉도록 무표정한 설명이군. 그럼 이딴 소린 책에 왜 적어놓은 거야...
'복통과 복부 팽만감'
그런가? 좀전엔 몰랐는데 읽고보니 배도 좀 이상하다.
'윗배와 앞가슴에 특징적인 붉은 반점'
옷을 걷어 본다. 분명히 그런 건 없다. 그렇지만... '반점은 2주째에 나타난다...'
그럼 아직 모르는 일?
'발병 첫주의 특징으로는 간과 비장의 종대(붓는다). 간과 비장을 만질 수 있다.'
누워서 간과 비장을 짚어본다. 만져진다... 숨을 들이쉬며 배를 부풀리는 순간 손바닥에 느껴지는 부피감...
이젠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니, 적어도 staire는 그렇게 생각했다. 걸렸군... 1종 법정 전염병인 장티푸스. 생존율이 얼마더라?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치사율 12%'
치사율이 끔찍스럽도록 높다. 열에 한 명 이상이라니... 그걸 읽는 순간 어지럼증이 심해지며 잠시 아찔한 느낌. 안 돼, 난 살아야 해. 항생제, 항생제...
구급 상자를 꺼낸다. 장티푸스에 특효라면 chloramphenicol. 그렇지만 그건 없다. 그럼? 아스피린... 아냐. 장티푸스에 아스피린은 금물이다. 스테로이드... 그래, 스테로이드. 하지만 구급 상자 속의 스테로이드는 스테로이드 연고 뿐이다. 저걸 먹어? 아니면 이마와 배에 발라 봐? 아냐... 침착, 침착...
'Chloramphenicol을 쓸 수 없는 경우엔 ampicillin, amoxicillin...'
하필 집에 없는 것뿐이다.
'... 또는 trimethoprim과 sulfamethoxasole의 복합 처방...'
음... 그 복합처방은 낯이 익어... 근데 그 복합 제제의 상품명이 뭐더라...
그 두 가지에다 bacitracin을 섞었던가 ... 아닌가...
현기증이 한층 심해진다. 방바닥에 누워 이리저리 구르면서 필사적으로 그놈의 상품명을 떠올렸다. 그래... 박트림... 마침 박트림이 있다. 휴... 살았다.
약을 먹어도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 해열제가 있으면 좋을텐데... 근데 아스피린은 왜 안되는걸까? 해열제로는 그만인데... 내과책에는 역시 무표정한 설명이 붙어 있다.
'아스피린은 장출혈과 장파열을 촉진시키므로 금한다.'
그렇지. 장티푸스의 가장 심각한 부분이 바로 장출혈과 장파열이니...
그럼 소화기에 무리를 주지 않는 acetaminophen(상품명 : tylenol)은 어떨까? 그건 책을 찾아볼 필요도 없다. 구급 상자엔 빈 통만 달랑 구르고 있었으니... 할 수 없이 살모넬라균(Salmonella typhi)과의 싸움은 항생제만으로... 열에 들떠 잠을 이루지 못하고서 이리저리 뒤척였다...
얼굴에 비쳐드는 햇살에 눈을 뜨고보니 10시다. 지각이지만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박트림을 두 알 더 먹고 학교로 향했다.
"저어... 늦은 건.. 다름이 아니라... typhoid fever 때문에..."
"뭐? typhoid?"
"예... 아무래도 지난 주 전염병동 실습때 전염된 것같아요."
"증상이 어땠는데?"
"열이 40도 8부. 간이 만져지고..."
"그리고?"
"... 생각해보니 그것밖에 없네요..."
최강원 교수님(전염병 전문가)은 한심하다는 눈치...
"간이야 열이 날 때 붓기 쉬운 거 아닌가? 좀더 specific한 게 필요한데..."
"글쎄요... 하지만 지난 주에 전염병동..."
"자, 자, 하루 사이에 열이 뚝 떨어졌다면 아무리 항생제가 좋기로서니 장티푸스는 아냐. 정 의심스러우면 혈액 검사를 좀 해 볼까?"
"아, 아닙니다..."
"혈액 검사에서 봐야 하는 게 뭐지?"
에구... 이건 긁어 부스럼이다.
"에... 또... leukopenia(백혈구 감소)..."
"얼마나?"
"3000, 아, 아니, 4000인가..."
"그리고?"
원래 교수님이란 학생들이 대답 못할 때까지 질문하시는 법이며 잘못했다는 소리를 들으실 때까지는 고삐를 늦추지 않으신다. 전날 밤 내과 책에서 읽은 밑천이 다 떨어지고도 실컷 더 시달린 끝에 간신히 빠져나왔다.
'휴... 환자를 이렇게 다루는 의사가 어디 있담?'
그나저나... 그날 밤의 고열의 정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의대생이 있다면 전염병동에서 단단히 주의하시기를... 아, 그리고 구급상자는 늘 꽉꽉 채워둡시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21일(화) 21시40분21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9 : 생쥐와 인간(?)
"왕께서는 언젠가 소를 구해주신 적이 있다면서요?"
"아.. 그 일... 밖에서 구슬픈 소 울음 소리가 나기에 내다보니 제사에 쓸 소를 끌고 가는 중이었소. 그 처연한 울음소리가 가슴을 저미는 듯하여 사람들에게 일러 소를 살려주라 한 적이 있소."
"그럼 제사는 제물 없이 지냈습니까?"
"그럴 수야 없는 일... 소 대신 양을 쓰도록 했소이다."
"소 대신 양을 쓰도록 하신 이유는 소 값이 양보다 비싸기 때문에 소가 아까와서 그러신 것은 아니지요?"
"아니외다. 소의 가련한 울음소리를 듣고 측은해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오."
"그럼, 왕께서는 소는 가련하고 양은 가련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허어... 이치가 그렇군...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소."
"아닙니다. 부끄러워 하실 필요 없습니다. 소를 측은히 여기셨으나 양을 헤아리지 못하신 것은 소의 울음 소리를 들었으되 양의 울음 소리는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치와 사리를 논하기 이전에 눈앞에 있는 것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 그것이 곧 어짊(仁)인 것입니다."
- 맹자 (맹자와 어느 왕의 대화)
85년의 어느 화창한 봄날, 본과 1학년이던 staire는 실험실 앞을 지나다 실험실 앞뜰에서 흰 쥐 한 마리를 발견했다. 몸길이 약 10cm 정도(꼬리 빼고)의 귀여운 mouse. Rat은 몸길이가 거의 20cm에 달하고 징그러운 느낌을 주지만 mouse는 귀엽기만 하다.
녀석은 풀숲 사이를 이리저리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움직임이 굼뜨고 비실대는 느낌. 쥐란 동물은 상당히 재빠른 녀석들인데...
'뭔가 사연(?)이 있어...'
staire는 손을 뻗어 쥐를 안아 올렸다. 쥐는 순순히 손에 올라 앉았다. 가까이 놓고 보니 더 귀엽다. 새하얀 털빛, 빨갛고 큰 눈, 약간 풀이 죽어 처진 흰 수염, 그리고 분홍빛 발...
'이걸 집에 데려가 길러 볼까? 하지만 혹시 미생물 실험실에서 폐렴균이라도 잔뜩 먹여둔 쥐라면? 아니면 어느 실험실에서 실험 도중에 도망쳐 나온 녀석일지도...
만일 그렇다면 실험실에선 이 쥐를 애타게 찾고 있겠지?'
그래서 쥐를 데리고 생리학 실험실로 갔다. 생리학 조교들은 그 쥐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했고 그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괜히 여기저기 찾아다니지 말고 그거 사육실에 맡겨. 거기서 관리하게 돼 있거든."
무표정한 사육실 직원에게 쥐를 건네주며 왠지 섭섭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새 꽤
정이 들었는데... 몇 번이나 돌아보며 문을 나서는 staire를 빤히 바라보는 녀석의 힘없이 처진 수염과 울먹한 느낌의 빨갛고 맑은 눈... 그 눈빛을 한동안 잊을 수 없었다.
1년이 지났다. 어느 새 그 쥐에 대해선 까맣게 잊은 staire는 2학년이 되었다. 아마 녀석을 만난 지 꼭 1년이 되는 무렵이었을 거다. 그날은 약리학 실습이 있었다.
그날의 실습은 한마디로 '죽음의 제전'. 두 가지 실험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rat을 이용하는 것으로 병에 마취제(halothane이던가?)를 넣고 rat을 한마리씩 집어넣어 죽는 데 걸리는 시간을 재는 것이고 또 하나는 800마리의 mouse(mice?)를 40마리씩 20조로 나누어 마취제 농도를 달리 하며 주사해 30분 간격으로 죽은 mouse 수를 세는 실험.
Rat 들은 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저항을 했다. 녀석들도 그 병이 아우슈비츠(?)임을 본능적으로 아는 걸까? 실험은 쥐들과의 실랑이로 지지부진했다. staire의 실험조만 빼고...
이상하게도 실험 동물들은 staire의 말을 잘 들었다. 아마 staire에게 짐승스런 면이 많이 남아 있어 그런 것일까? 다른 조에서 한 마리를 집어넣지 못해 끙끙거릴때 이미 staire는 네 마리째를 처리하고 있었다. 배를 왼손으로 감싸고 오른손으로 등과 머리를 쓸어주며 병주둥이로... 그런데 이 녀석만은 staire가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필사적으로 허리를 뒤틀어 staire의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조교가 달려와 쥐를 붙잡았다.
"이거 보라구. 이런 쥐는 조심해서 다뤄야 할 거 아냐..."
쌀쌀맞기로 유명해 KGB라 불리는 약리학 조교가 손가락으로 쥐의 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쥐의 배에는 두 줄로 젖꼭지가 나 있었다. 암컷이다. 그런데 평소에 비해 젖꼭지가 크고 선홍색을 띠고 있었다. 임신한 것이다... 방어 본능이 극도로 예민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staire는 그런 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상처는 깊었다. 두 줄로 찢어져 피가 솟고 있었다. 준비실로 달려가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 실험실로 돌아와보니
KGB가 애들을 야단치는 중이었다.
"또다시 이런 식으로 소란을 피우면 전부 0점처리할거야..."
staire를 보고도 많이 다쳤느냐고 묻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KGB는...
'잘 됐어. 이참에 좀 쉬자....'
창가에 앉으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창밖은 화창한 봄날. 비쳐드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두 번째 실험이 시작되었다. 할당받은 40마리의 쥐에 주사를 놓기 시작했다. 이번엔 조그만 mouse여서 애처로움이 더했다. staire의 조는 비교적 농도가 낮은 편이라 반 이상 죽지 않는다고 한다. 벌써 쓰러져 굳어가는 녀석들을 골라내며 숫자를 기록하느라 다들 바쁘다. staire만 창가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물린 손이 쓰리고 욱신거려 도저히 실험에 참가할 수 없었다.
"끝까지 살아남은 쥐는 어떻게 해요?"
"뭘 어떻게 해. 해치워야지. 제한 시간(3시간) 되면 숫자 기록하고 살아남은 놈들은 치사량을 주사해서 전부 죽여버려..."
비정한 KGB... 하긴 살려둘 의미가 없다. 이미 약물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실험용 동물로서의 가치를 잃은 것이다. 살려 두어도 며칠을 넘기지 못하리라. 하지만 꼭 저렇게 표현해야 할까... 해치워... 죽여버려... KGB는 학생이나 쥐나 똑같이 대하는거야...
비실대는 쥐들 중에 제법 똘똘한 녀석이 있다. staire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 눈빛... 그랬다... 1년 전에 만났던 쥐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이제 알 것같다. 스스로 달아날 수는 없는 일이니 누군가 쥐 한 마리를 도망시켜 준 것이리라. 녀석이 왜 비실거렸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때 만났던 쥐는 며칠 안에 죽었겠지.
KGB는 통계 처리 방법을 강의하고 애들은 필기하느라 바쁘다. 아무도 창가에 앉은 staire에게 신경쓰지 않는다... 테이블에는 유리병 속에 이미 죽은 rat들이 뒹굴고 있다. 임신한 쥐도 퉁퉁 불은 젖꼭지를 드러낸 채 죽어 있다. 어미 쥐의 필사적인 저항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단지 죽기 위해 동원된 쥐들이지만 그들에게도 생명은 소중한 것일까? 목숨을 걸고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 쥐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모성애와 같은 것일까... 1년 전 staire를 바라보던 눈빛은 공허함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지금 staire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저 쥐의 눈빛은..
staire는 슬그머니 일어나 철망을 열고 쥐를 꺼냈다. 틀림없이 살아남을 녀석이다.
쥐를 가운 주머니에 넣고 창가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녀석을 창밖의 뜰에 내려놓았다. 쥐는 비틀거리면서도 풀숲을 헤치고 기어간다...
봄볕이 내려쬐는 창틀에 턱을 괴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뒷모습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누군가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KGB였다.
"쉬잇..."
KGB는 뭐라고 말하려는 staire를 제지했다. 그리고 쥐가 사라진 풀숲 그늘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자네인가... 난 본과 1학년 때 실험실에서 도망친 쥐를 발견한 적이 있지. 너무 귀여워서 집에 데려다 길렀지만 며칠 못 가 죽고 말았어. 1년이 지난 후에야 그게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았지. 그리고 마치 자네처럼 나도 한 마리를 살려주었어. 벌써 4년 전 일이야... 내가 도망시켜 준 그 쥐가 어느 마음씨 고운 사람을 만나기를 빌었더랬어. 그리고 나서 그 일은 까맣게 잊었지. 살벌한 의대 생활 속에서 그때의 쥐에 대한 기억을 잊고 냉정하게 살아왔는데... 아직도 의대생들은 내 어릴 적의 모습들을 간직하고 있군..."
그럼 그 쥐를 발견한 사람도 실험 때 다른 쥐를 살려 주었고 또 그 쥐를 만난 사람, 또 그 다음 쥐... 그렇게 오늘까지 계속되어 온 것일까? 아니, 그럼 KGB가 만났던 쥐를 도망시킨 사람은 또 누구였을까?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일이었을까?
물론 실험 규정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며 도망시킨다 해서 쥐에게 무슨 대단한 것을 베푸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가끔 의대를 들를 때면 실습실 앞의 작지만 화사한 뜰을 거닐 때가 있다.
어디선가 귀여운 흰 쥐 한 마리가 기어나올 듯한 착각에 빠져...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22일(수) 21시58분49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20 : 10억짜리 신랑감
나뭇가지 아래, 빵 한 덩이
포도주 한 병, 시집, 그리고 그대...
- 오마르 카이얌, '루바이야트'에서
본과 2학년 때였다. 부산에서 서둘러 올라오신 어머니께서 갑자기 선을 보라는 거다. 아니, 이 젊은 나이에 무슨... 하며 펄쩍 뛰는 staire에게 이모들까지 합세해서...
사연인즉, 어느 집에서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와 딸 둘, 이렇게 여자들 셋만 남았는데 남자가 하나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왜 하필 저를?"
"하필이라니... 잘 아는 집이니까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사실 그 나이 때의 젊은 애들 치고 맞선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을 갖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staire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긴 하다.)
그런데 나중에 듣기로는 거기엔 14억이라는 돈이 걸려 있었던 거다. 돌아가신 분은 유산을 동산으로만 14억을 남기신 거다. 부동산은 빼고... 그리고 유언장이 참 단순했다. 큰딸과 결혼하는 사위에게(큰딸에게...가 아니다) 10억과 부동산 전부를, 작은 사위에겐 4억을 남기신 거다. 물론 어머니를 모시는 건 맏사위.
이제는 단순히 맞선에 대한 거부감의 차원이 아니다. 도대체 이런 조건으로 사위를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도 당혹스러운데 왜 staire가...?
어쨌든 맞선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내가 과연 억대 신랑감인가 하는 의문을 덮어둔 채 약속 날짜를 잡았다. 그런데...
"제가 언제 큰딸하고 결혼한댔어요?"
"왜? 큰딸도 너하고 같은 나이잖아... "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기왕 만나는 거 둘다 만나야지 왜 큰딸 쪽으로 몰고
가시는 거냐구요."
"그랬나? 하여간 일단 큰딸부터 만나보고..."
이건 뭔가 잘못된거야. 10억이 얼마나 큰 돈인지 모르지만... 어머니께선 그냥 들어온 혼담이니까... 하시는 정도였지만 이모들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예민했다.
무조건 큰딸을 택해야 한다는거다. 4억도 큰돈이지만 4억을 갖고 3년을 기다려봐라. 10억이 되나. 여자 나이 3년 차이는 3년 지나면 그게 그거야... 이모들의 말씀을 듣고서야 자매의 나이 차가 3년이라는 걸 알았다.
친구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야, 네가 설마 돈 몇억에 아쉬운 인생이겠냐. 젊은 여자를 택하는 게 백번 나아. 나이를 어떻게 돈 주고 사냐?"
이런... 결국 그게 그거다. 도대체 돈 몇억과 여자의 젊음... 이런 게 만나보기도 전에 단정지을 수 있는 대단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맞선'은 결국 맞선이 아닌 미팅처럼 돼버렸다. staire가 끝까지 고집을 부려 언니와 동생을 한꺼번에 만난 거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지나고 어른들께서 자리를 피하셨다...
"죄송해요. 제가 좀 서툴러서... 사실 전 이런 자리에 나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러시겠죠. 우리도 그런 걸요."
언니는 대학 4학년. 동생은 1학년. 둘다 맞선 같은 걸 보고 다니기엔 젊다.
14억...이란 요소를 배제하고 보면 상냥하고 소박해보이는, 사실 누구와 결혼해도 후회할 것같지 않은 좋은 아가씨들이었다. 세 사람은 점차 편안하게 어울리기 시작했고 아가씨들의 어머니께서 주문해 둔 와인을 맛보며 실속없는(?) 음악과 시, 연극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정말 우리 둘 중 하나와 결혼하실 생각이 있는 거에요?"
언니 쪽에서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한 얘기를 꺼냈다.
"글쎄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얘기할 만한 게 아닌 것같죠?"
"그래요... 우리도 사실 오늘 저녁, 즐겁게 보낼 생각 뿐이지 어른들처럼 신랑감을 보러 온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하하... 그리고 둘 중 한 분을 택하기로 하면 나머지 한 분께 미안해서 어떡합니까. 남도 아니고..."
"혹시 10억과 4억에 대한 얘기 들으셨어요?"
"예... 재미있는 얘기더군요."
"우리도 그래요. 남의 일처럼 재미있기만 해요."
"전 10억이든 4억이든 생기면 의대 당장 그만두고 하고싶은 거 할 생각입니다. 아마 어른들께서 이런 생각을 아시면 혼담이고 뭐고 다 끝나는 거겠죠. 제가 의대생이 아니었으면 이런 얘기가 나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맞아요. 어머닌 그돈으로 병원이나 하나 짓고... 그렇게 생각하시거든요."
"그럼 어머니께 그렇게 전해주시겠습니까? staire는 뭘로 먹고 살 지 모르지만 적어도 의사가 되지는 않을 거라구요..."
"그럴께요. 다시 만나더라도 이런 자리에서는 아니었으면 해요."
그 자매들과는 그 후로도 가끔 만났고 꽤 오래 사귀었다. 물론 늘 셋이서... 혼담은 당연히 깨어졌고 이모들의 실망은 컸다. 어머니는 '그럴 줄 알았어...'하고 웃으며 넘어가셨지만...
이제 그 자매는 10억과 4억의 주인을 만났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돈이 아깝지 않은건 아니지만... 좀더 자연스러운 자리에서 만났으면 뭔가 이루어질 듯도 한 멋진 아가씨들이었는데...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6월23일(목) 00시52분06초 KDT
제 목(Title): 의대 series 21 : '86 합창단 연주회
Dilettante가 활개치고 다닌다.
Amateur가 나돌아 다닌다.
이 땅에 심미주의자의 목소리까지 들리니
우리들에게 파국이 다가왔다.
- J. M. Whistler (미국의 화가. 1834 - 1903)
1986년 2월, 개강 직전이었다. 친구 승태의 전화를 받은 staire는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네가 금년에 지휘를 해야 한다는 거야."
이게 웬 날벼락... staire는 본과 1학년을 보내며 도저히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둘다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둘다 몸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고 연주회 시기도 비슷해서 연습 날짜가 수시로 겹치는거다. 결국 staire는 합창단은 포기하고 오케스트라(SNUMO)에 전념하기로 결심했고 합창단 단장을 맡은 승태에게도 이미 그렇게 얘기한 뒤였다. 그런데 갑자기 합창 지휘를 하라니...
다음날 승태를 만나 얘기를 들었다. 상황이 심각하긴 했다.원래 합창단은 지휘자가 둘이다. 정지휘자는 본3, 부지휘자는 본2. 그런데 정지휘자로 내정된 형이 갑자기 합창단을 떠난 거다. 혼자 남겨진 부지휘자 석재로선 혼자 연주회를 끌고 나갈 수 없다며 지휘자 하나를 더 구해야 한다는 얘기... 우리 학년 애들 중 승태는 단장, 민호는 반주, 기웅이는 테너 솔로... 지휘를 맡길 사람이 없었던거다.
그나저나... 무슨 뛰어난 실력이 있어 지휘자로 추대된 것도 아니고 보니 준비가 돼 있을 리가 없다. 원래 연주회 준비는 겨울방학때 시작된다. 선곡, 악보 입수, 공연장 섭외... 모든 일이 이미 끝나 있어야 할 시기에 일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당장 첫 주 연습에서 할 게 없는 한심한 상태였다.
문제는 또 있다. 군기가 엄하기로 유명한 SNUMO에서 이 일을 용납할 것인가 하는 문제. 이미 staire는 SNUMO에만 충성(?)하기로 선배들께 약속했는데... 우선 악장형을 만나 사정을 설명하고 '합창 지휘를 이유로 오케스트라 연습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허락을 받았다. 글쎄... 지휘자라는 녀석이 다른 서클에서 이런 약속을 했다는 걸 알면 합창단 쪽에선 뭐라고 할까...
게다가 집에는 또 뭐라고 설명하나... 어머니께 합창단은 그만두겠다고 이미 말씀드렸는데... staire가 기회만 생기면 의대를 떠나려 하는 걸 잘 아는 부모님들의 입장에선 합창 지휘라는 게 달가울 리가 없는 것일 텐데...
어쨌든 일은 벌어졌다. 3월, 4월에 부지런히 음대 도서관을 뒤지고 다른 대학 합창단을 찾아다니며 선곡을 하고 악보를 구했다. 사실 전부터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오페라의 합창... 언젠가 합창 지휘를 하게 되면 그걸 꼭 해보고 싶었던 거다. staire가 제일 좋아하는 레온카발로의 'Pagliacci'에 나오는 '종의 합창' 악보를 구했다. 그러나 결론은... 대학 합창단이 건드리기엔 너무 섬세하다...
좋은 합창곡이 많기로는 마스카니의 'Cavalleria Rusticana' 제 1장도 빼놓을 수 없다. 개막과 동시에 시작되는 '아침 기도',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라는 유명한 곡이다. 그 다음에는 멋진 남성 합창 'Il cavallo scalpita(말들은 뛰놀고)'가 이어진다. 그리고 온 마을 사람들이 부활절 미사를 위해 성당으로 가면서 부르는 'Regina coeli...' 이 부분은 제 1장의 절정이다. 제일 욕심나는 곡은 사실 세 번째 곡이다. 하지만... 합창단 2개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중간 이후에 나오는 주인공 산투짜의 솔로 부분(Inneggiamo, il signor non e morto...)을 감당할 만한 소프라노가 없다...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는 부분인데...결국 '아침 기도'로 낙착을 보았고...
평년의 규모로 일을 벌이기에는 시간도 인력도 부족했다. 상당히 축소된 규모의 연주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남성 합창, 여성 합창은 없어졌고 staire가 맡은 것은 한국 가곡, 오페라 합창, 대중음악의 세 부분, 석재는 흑인 영가와 미사.(어쨌든 석재는 내년에 또 지휘를 해야 할테니... 정지휘자는 staire였던 셈이다.)
포스터를 제작할 때쯤 해서 갑자기 staire에게는 걱정거리 하나가 늘었다. 서울 시내곳곳에 나붙을 포스터에 내 이름이 찍히면 동생이나 이모들이 볼 게 틀림없고 (그때 동생은 경희대 합창단의 반주자였다.) 부산에 계시는 어머니의 귀에 staire가 지휘를 한다는 소식이 들어가면 마음이 편하실 리가 없으니... 그래서 승태에게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고 나선 것이다.
"뭐? 포스터와 프로그램에 네 이름을 빼 달라고? 그게 말이 되냐?"
물론... 지휘자 이름이 없는 연주회 포스터... 말이 안되는 줄은 안다.
"하지만 석재 이름은 실을 수 있으니까..."
"두 section 맡은 석재 이름만 넣고 세개를 맡은 너는 없고... 그게 뭐니?"
"알아... 말이 안되는 거... 하지만 난 도저히 내 이름이 찍힌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는 걸 감당할 수 없어..."
승태도 staire가 그런 요구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어쨌든 연주회가 두 달도 안남은 상황에 지휘자를 바꿀 수도 없고... 결국 포스터와 프로그램은 staire가 빠진 상태로 제작되었다.
"넌 결국 후회할거다. 네가 지휘를 했다는 기록은 아무데도 남지 않을거야."
하지만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거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것...
연주회가 다가오는데도 연습은 지지부진... staire가 의대 오케스트라 연습에 가는 날이면 석재 혼자 연습을 시켰고 여름방학 내내 staire는 미처 구하지 못한 악보를 찾아 이리저리 뛰었다. 여름 캠프도 오케스트라와 겹치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아마 합창단 역사에 여름 캠프에 안 간 지휘자는 staire밖에 없을 거다. 'My fairlady'에 나오는 합창곡 'Get me to the church on time'은 반주 악보가 없어 음반을 들으며 채보하여 피아노 악보를 그리는 등 악전고투의 연속...
드디어 연주회 일주일 전이 되었다. 그동안 고생한 보람... 같은 건 생각지 않기로 했다. 그저 무사히 끝낼 수만 있다면...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재난이 staire와 합창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86년에 대학을 다닌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86 Asian games(여기 s를 꼭 붙여야 하나?) 직전에 전국의 대학들이 기습적으로 휴교를 한 일이 있다. 소위 'Asian 방학'.
사실 그 전날 의대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있었다. 임헌정 선생님의 지휘로 'Peer Gynt'를 연주했던 기억에 오래 남을 연주회... 그리고 연주회날 밤 after는 모처럼 MT를 겸해 마석으로 떠난 것이다. 밤새 놀고 아침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더니...
교문 앞 게시판에 휴교 공고가 붙어 있는 것이다. 이거 야단났다. 학교가 문을 닫으면 남은 일주일간 연습은 어디서 하나? 그리고 학교에 애들이 나오지 않으면 청중 동원은 또 무슨 수로?
일이 악화되느라고 그 다음날엔 김포 공항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
북한측에서 한 것인지 뭔지 모르지만 연주회를 열기에는 최악의 분위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쨌든 벌인 일이니 마무리는 해야 한다... 가까운 교회를 빌려 연습을 하기로 했다. 연주회장인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연주 취소를 종용하는 전화라도 날아올까봐 전전긍긍하는 사이 일주일이 지나고 연주회 날이 되었다.
리허설을 마치고 연주회까지는 앞으로 30-40분, 석재와 staire는 가까운 카페에서 위스키 스트레이트를 한잔씩...
"힘내..."
"그래... 너도..."
단원들이 무대에 정렬하고 조명이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후 첫 section을 시작하기 위해 staire와 반주자 자경이(간호학과)가 무대로 나갔다. 연주회장을 울리는 박수소리... 다행히 청중들이 연주회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박수 소리가 가라앉으며 들리는 객석의 웅성거림. 지휘자가 '이석재'가 아님을 알아챈 청중들의 어리둥절한 표정...
어쨌든 청중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자경이는 피아노 앞으로 갔다. 단원들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지었지만 그걸 과연 미소라고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앨토의 서정이(본1)가 나중에 그랬다.
"오빠는 시작하기 전에 묘한 표정을 지으셨어요..."
왼손을 들어 자경이에게 가볍게 신호를 보냈고 자경이의 피아노 소리가 잔잔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물결처럼 흐르는 8분음표... 김규환의 '물새'가 시작되었다...
음악 속에서 staire는 차차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두번째 section, 오페라 합창. 첫곡은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짧은 합창 'Giovani lieti, fiori spargete', 워낙 짧아 잘 연주되지 않는 곡이지만 무척 귀여운 곡. 가장 모짜르트다운 합창이 아닐까 싶다. 두번째는 스메타나의 '팔려간 신부'에 나오는 짤막하고 가벼운 폴카. 개성적인 반주 음형과 활달한 리듬...
가벼운 것 두 개를 해치우고 단원들의 긴장이 풀렸다. 이제 어려운 것들이다.
마스카니의 '아침 기도'. 자경이는 좀 까다로운 반주 때문에 무척 고생이 많았지...
단원들의 긴장이 풀리는 것이 반비례해서 staire는 점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땀이 비오듯 흐르기 시작하고... 이겨낼 수 있을까? 긴장감으로 터져버릴 것같다.
마침내 마지막 합창. 바그너의 탄호이저에 나오는 '순례자의 합창'. 객석의 잡음 때문에 조금 시간을 끌었다. 이윽고 쥐죽은 듯 고요해지자... 무반주의 첫 부분이 시작되었다. 'Begruessen...' 가사를 잊어먹었다. 지휘자가 그까짓 가사를 잊는 게 뭐 대단하냐고 생각하겠지만... 합창 지휘자는 모든 성부의 악보를 암기하고 있어야 하고 가사까지 알고 있어야 하는 거다. 단원들이 가사를 잊었을 경우 지휘자의 입을 보며 기억을 되살려야 하는데... 다행히 단원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중간에 잠시 반주가 나왔을 때 고맙게도 음이 거의 떨어지지 않은 걸 알았다. 무반주 부분과 반주 붙은 부분이 반복되는 곡의 경우 무반주 부분에서 음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결과는 치명적이다. 특히 이 곡처럼 섬세한 곡에선... 다시 무반주 부분. 바그너답게반음계가 얽히는 까다로운 대목이다. 연습할 때 staire를 꽤나 고생시킨... 이것도 무난히 넘어갔다. 이제 반주가 슬슬 들어오는 마지막 부분... 자경이 쪽을 슬쩍 보았다. 자경이는 그 짧은 순간에 미소를 지어 주었다...
마침내 연주가 끝났다. 그리고 staire의 합창단 생활도... 지휘를 하며 소프라노와 테너를 연습시키느라 원래 high tenor였던 staire는 목소리를 망치고 말았다. 하긴 꾀꼬리같은 목소리는 아니었으니 아까울 건 없다. (staire를 아시는 분은 아직도 staire의 목이 온전하지 않은 걸 아실 테지요...) 로비에서 만난 사람들은 staire를 보고 몰려들었다.
"너, 어떻게 된거야. 지휘자가 이름도 감추고..."
staire는 미소로 대답하고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After 장소인 대학로의 'Time'을 향해...
쌓인 피로가 밀려와 그곳에서 금방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은경이가 프로그램 하나를 건네 준다. 프로그램에는 백지가 하나 끼어 있다. 밤새 애들이 Rolling paper를 돌린 거겠지. 펼쳐 보니 단원들이 한 마디씩 적은 글들이 한눈에 밀려들었다.
'악조건 속에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신 형의 모습을 보며...'
이건 용진이.
'너의 편안하게 잠자는 모습이 많은 걸 이야기해주더군. 그렇지만 우리도 너때문에 두 배로 힘들었음을 알아 주겠지?'
요건 승태.
'그동안 아빠를 이해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어요...'
둘째 딸 정수의 긴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오빠. 저는 사랑을 하며 살고 싶습니다.'
평소와 다름 없는 지영이의 글.
한 모퉁이에 있는 서정이의 예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오빠와 노래할 때는 힘이 납니다.
그리고 오빠의 투철한(?) 책임감과
자기 통제가 가끔씩 느껴집니다.
그게 오빠겠지요. 하지만 힘들어요.
건강하세요...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길 빌어요...'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끝)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8월15일(월) 21시45분14초 KDT
제 목(Title): 서울역에서 만난 전경
적어도 증오의 감정은 순수해. 오도되기 쉽고 때묻기 쉬운 '사랑'이라는 애매한 개념보다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훨씬 투명하게 보여주는 게 증오라는 거지...
- 87년 6월, 어느 서클 회지에서
학교는 휴교 상태였지만 우리는 매일 모여서 끝없는 토론으로 시간을 보냈다.
전두환의 호헌 선언 이후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던 87년, staire의 본과 3학년 시절은 그렇게 얼룩지고 있었다.
"폭력을 반대한다구요? 물리력과 폭력은 다릅니다. 선생님의 사랑의 매를 당신은 폭력이라고 부릅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폭력이 아닌지 석연히 구별해낼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것은 증오입니다. 저변에 증오의 감정이 깔려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물리력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무력 투쟁이 증오에 좌우되는 맹목적인 폭력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증오감과 복수심에 사로잡혀 거리에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재철이의 열띤 목소리에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무력 시위에 대해 시큰둥한 표정들이었다. 그보다는 어느 진료 서클의 회장인 상준이의 주장이 훨씬 매력적으로 들렸다.
"흰 가운을 입고 나가는 겁니다. 시민과 학생, 전경 구별 없이 부상자들을 치료해줄 수 있는 중립 지대를 우리가 만드는 거에요. 지금 분위기는 너무 뜨거워요. 식힐 필요가 있습니다..."
투표를 거쳐 진료 봉사쪽으로 대세가 기울었고 우리는 조를 짜서 거리로 나서게 되었다.
흰 깃발과 흰 가운... 서울 의대 본과생들로 이루어진 의료 봉사단은 시내 곳곳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의료 봉사래야 간단한 응급 처치 수준이었지만 우리가 깃발을 세우고 테이블을 벌여놓은 것만으로도 그럴듯한 중립지대가 형성되었다. 학생이건 전경이건 우리 앞에서는 양처럼 온순했고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거리에 내던져진 젊음과 자신의 뜻에 무관하게 소모되어가는 젊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순수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모습...
최루 가스에 눈물을 흘리고 초여름의 따가운 볕에 그을리면서도 우리는 쉴 틈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를 찾는 사람은 점점 더 불어났고 모자라는 약품을 대기 위해 이리저리 뛰는 여학생들의 발길은 더욱 바빠졌다.
staire가 있던 곳은 서울역 광장. 본격적인 충돌이 한 번 있은 뒤여서인지 우리로선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환자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고 간단한 응급처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이들을 실어나르는 정호와 윤호의 차 시트에는 핏물이 배어들고 있었다. 눈을 다쳐 흐르는 피가 멈추지 않는 여학생을 부축해 온 어느 청년의 이글거리는 눈을 보며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증오감의 유무로 판단한다는 건 불가능해. 저 분노에 타오르는 눈빛을 보면...거리에 나선 이상 자신의 감정마저도 스스로의 것이 아니야. 여기엔 전염병처럼 증오의 씨가 뿌려지고 있는 거야. 비폭력 투쟁이란 간디와 같이 느긋한 성인 군자들에게나 가능한거야...'
한 차례 파도가 쓸고 지나간 뒤 우리는 숨을 돌렸다. 다행히 전경들도 진료 봉사단의 영역을 인정해주었고 우리 팀중에 다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간호학과 여학생 하나가 일사병으로 쓰러져 집으로 보내어진 것을 제외하면...
따가운 눈 주위를 찜질용 얼음으로 비비며 잠시 쉬고 있던 우리는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긴장했다. 한 무리의 시민들이 우리 쪽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백골단이다!"
그들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들...특별히 성격이 비뚤어진 자들로 구성된다는 냉혈 집단이 우리를 향해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떡하지? 일단 물러날까? 저녀석들이 우리라고 해서 그냥 놔두진 않겠지?"
"하지만... 쟤들도 인간인데 설마... 그리고 이 약들과 의료 장비... 이걸 버리고 간다는 건..."
"안돼. 우리에겐 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비도 없잖아. 맨손으로 저녀석들 앞에서 버틸 수는..."
말을 맺을 틈이 없었다. 백골단의 짧은 곤봉에 진태가 머리를 호되게 맞고 쓰러지는 것을 신호로 우리는 역 오른편의 골목길을 향해 뛰었다. 그들은 약병과 붕대를 늘어놓은 테이블을 뒤엎고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다. 흘낏 돌아본 눈에 비친 광경은 치료를 받고 얼음 주머니를 얼굴에 대고 있던 어떤 청년을 방패(백골단 특유의 작고각이 진)로 내리찍는 모습...
그때 staire의 가슴을 꿰뚫은 감정은 분명 증오감이었다. 손에 기관총이라도 들고 있었다면 앞뒤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쏘아붙였을 정도로 맹목적인 증오...
학생 전투대의 반격으로 백골단의 기세는 좀 누그러졌지만 진료 봉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내일도 이 자리에서 진료 봉사를 하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운은 달아나기에는 무척 거추장스러운 옷이다. 어느 가게집으로 뛰어들어간 staire와 한석이, 민규는 친절한 가게 아주머니에게서 물을 얻어 마시며 숨을 돌렸다.
"아무래도... 문을 닫아야겠어. 학생들은 어떻게 할거야?"
"죄송합니다만... 당분간 나가기 어렵겠군요. 잠시 신세를 져도 될까요?"
아주머니는 아무 말 없이 문을 닫으러 나가셨다. 그때 구르다시피하며 뛰어들어온 사람은... 헬멧과 방패를 잃어버리고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청바지와 청조끼를 입은 백골단 녀석이었다. 곤봉을 쥐고 있는 손에도 힘이 없어보였다. 그는 가운차림의 우리를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겁먹은 눈... 전쟁을 겪은 일은 없지만 전쟁터에서 느끼는 광기라는 것은 이런 걸까... 대열에서 낙오된 병사의 왜소한 모습이란...
"아주머니, 얼음하고 붕대 좀 구할 수 있을까요?"
"붕대는 내 가운 주머니에 몇 개 있어..."
우리는 그의 터진 머리를 씻어내고 항생제 연고를 대충 바른 후 그의 머리를 싸매어 주었다.
"백골단은 싸움에 나서기 전에 술을 마시거나 흥분제를 먹는다던데... 정말이에요?"
그는 대답 없이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식아! 니네 대장이 그렇게 시켰니? 우린 그렇다 치더라도 부상자를 그렇게 두들겨패는 법이 어딨어!"
"......"
다혈질인 한석이의 화난 목소리에도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가게에 딸린 살림방 들창으로 밖을 내다보시던 아주머니는 우리를 보고 말씀하셨다.
"이제 조용해진 것같아. 학생들, 이제 나가도 되겠는데..."
"아주머니, 실례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아주머니가 안내하시는 대로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맨 끝에는 그 백골단 청년이 말없이 따라나왔다.
"헤어지는 마당인데... 악수나 합시다.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래야겠지요..."
민규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
그는 고집스럽게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민규가 어색하게 돌아서는 순간...
"민규야!"
"안돼!"
staire와 한석이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그 백골단 청년이 등을 보이고 돌아서는
민규의 뒷머리를 곤봉으로 힘껏 내려친 거다.
"야 이 개새끼야!"
한석이가 길바닥에 구르는 돌을 집어 힘껏 던졌으나 돌은 달아나는 그에게서 한참
빗나가 어느 담벼락을 때렸다.
staire는 민규를 안아 일으켰다. 눈이 풀린 민규의 뒷머리는 무섭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핏발이 선 눈으로 씩씩거리는 한석이,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늘어져 있는 민규를 번갈아 보며 staire는 다시 속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우리가 피해야 한다는 폭력, 버려야 한다는 증오...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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