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동창회

7시까지 학원 앞에서 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늦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빠른 걸음으로 학원 앞으로 걸

어간다. 6시 50분이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 그런데 왜 학원 끝나는 시간에 학생들이 하나도 안 보이

지? 학원 입구 앞에는 휴대폰 화면을 계속 확인하고 서있는 손시연과 어떤 여학생 둘뿐이다.

'많이 기다렸어? 빨리 오려고 지하철역부터 막 뛰어왔는데.'

다행히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는 듯, 밝은 얼굴이다.

'아뇨. 방금 끝나서 별로 안 기다렸어요. 아저씨, 이 근처 뭐 먹을 데 있는지 알아요?'

'나도 이 근처는 안 와봐서 잘 모르겠네. 아까 오다 보니까 음식점 몰려있던데 거기로 가보자.'

둘이 걸어갔던 그 길은 도로 사정이 그렇게 좋지 못 했다.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곳곳에 물이 고여있고.

자동차도 많이 지나가고 있다. 야야, 앞 좀 보고 걸어 네 앞에 물 고여있는 거 안 보여?

'조심해. 조심'

나는 손시연이 고인 물을 피할 수 있게 어깨를 감싸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엄마야!'

너무 세게 끌어당겼나. 얘가 왜 이렇게 깜짝 놀라? 엄마까지 찾고. 괜히 나까지 놀랬잖아. 절대로 나쁜

뜻으로 그런 게 아니거든? 내가 조금만 늦었으면 너 신발이랑 양말까지 다 젖을뻔했어.

손시연이 놀랐는지 얼굴이 빨개져서 날 보고 웃으면서 말한다.

'아저씨. 무슨 여자를 갑자기 그렇게 확 잡아당겨요? 간 떨어져 죽을뻔했네. 휴...'

'그래, 사모님 걸어가시는데 미처 주변을 살피지 못해 물을 늦게 발견한 내 잘못이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고마워. 됐죠? 근데 아저씨 생각보다 힘세다. 오 팔근육!'

고마워. 그런데 어째 칭찬같이 안 들린다? '생각보다' 세다니... 또 장난 시작이니?

'요즘에 나 헬스 하잖아. 나 정도면 평균 이상은 돼.'

'그래 봤자 비, 권상우에 비하면 아직 멀었거든요 아저씨?'

그래. 그건 나도 인정. 근데 한 번만 더 조인성, 권상우 타령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어. 손시연

한채영, 김태희 세트로 너랑 비교 분석해줄게. 그때 가서 상처받았니 뭐니 해야 소용없어.

'여기 맛있을 거 같다. 부대찌개 좋아해?'

'그럼요. 완전 좋아함. 여기서 먹어요.'

식탁에 앉자, 손시연이 수저를 챙겨주고 나는 물을 따라준다. 생각보다 호흡 잘 맞는 거 같아 우리. 다

른 여자 만날 때는 수저 챙겨주고, 물 따라주는 거부터가 신경 써야 될 부분이었는데... 부대찌개가 나온다.

맛있게 먹어. 너 잘 먹는 모습이 좋더라 나는.

'그러고 보니 너 음식 가리지 않고 정말 잘 먹는다. 완전 잡식동물 같아. 너네 집에 밥값 엄청 나오겠다.

너 그러다가 고3 때 되면 살 엄청 찐다.'

'우와... 사람 보고 잡식동물이래. 원래 공부하고 나면 배고프거든요? 그리고 나 살 안 찌는 체질이거든

요? 내가 밥을 많이 먹든 말든.'

손시연이 장난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러다가 정들겠다.

'알았어 많이 많이 먹어. 밥 하나 더 시켜줘? 너 모자라지? 표정 보니까 정말 모자란데?'

'네 정말 모자라요 지금. 근데 됐어요. 그냥 집에 가서 저녁 한번 더 먹어야겠다.'

하기야. 하나 더 먹기에는 여기 너무 밥을 많이 퍼준다. 그리고 집에서 한번 더 먹기는 무슨.

'근데 아저씨. 동창회 몇 시까지 가야 돼요? 나 때문에 늦는 거 아니에요?'

아, 동창회 가야지.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만나서 놀고 있다고 문자 왔었는데. 7시 30분이네. 그만

일어서자 우리.

손시연과 나는 지하철을 같이 탔다. 성수에서 손시연이 내리고 나는 곧장 강남으로 가면 된다. 성수에

가까워 올 즈음에 손시연이 말했다.

'맞다. 아저씨 다음부터 학원 토요일에 30분 일찍 끝난대요. 6시 반에. 아, 역 다 왔다. 아저씨 동창회

재밌게 놀고 와요. 갈게요.'

다음부터 6시 반에 끝난다고? 아, 오늘 그래서 10분이나 일찍 왔는데 아무도 없이 너 혼자 기다리고 있

었던 거구나. 일찍 끝나게 됐다고 말을 하지. 별로 참을성도 없으면서.... 너 은근히 나 미안하게 만드는

데 재주가 있어. 다음부터는 안 늦을게. 정말로.

강남역에서 내린 나는 동창들이 기다리고 있는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8시가 넘어선 시간이다. 저기 있

다. 고등학교 친구들. 와. 생각보다 많이 와있네.

'최성민이다. 야 성민아. 여기야 여기!'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김현석이 나를 보고 반갑게 부른다. 야.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 정말

많네 반갑다 진짜 내가 재수하느라고 그동안 연락도 잘 못하고.... 미안하다,

'야 최성민!'

'어?! 김창수!'

오랜만이다. 김창수 이거 거의 1년 반 만이지 우리? 한때 라이벌이었는데, 왜 이렇게 반갑지? 역시 멋

있는 건 그대로구나. 자식.

'최성민 너 멋있는 건 그대로네 오랜만이다. 인마'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인마. 반갑다. 반가워, 너 학교에서 완전 잘 나간다며? 소문이 자자하던데?'

'어디서 그런 헛소문이 도냐? 야 여기 내 옆에 앉아라'

'오 우리 학교 엘리트 2명이 모이셨네. 자 기념으로 다 같이 한잔 마시자! 최성민, 너 회비 만원 내는 거

잊지 말고 저기 하얀이한테 내.'

엘리트는 무슨... 역시 민석이가 분위기를 주도하며 술을 한 잔씩 따르게 한다. 나는 술을 한잔 마시고 

그동안 못 봤던 친구들을 만나서 인사를 나눴다.

나는 또 다른 아이들과 인사하기 위해 어떤 테이블로 다가간다. 그때였다. 갑자기 놀라서 머리가 하얘지

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턱하고 막힌다. 뭔가가 머리를 세게 때리고 지나가는 느낌도 든다. 강소영이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동창회에 강소영이 오지 말란 법은 없지. 젠장, 눈이 마주쳤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럴 때? 정말이지 최악이다. 이런 상황.

'안녕, 연대 갔다는 말 들었어. 오랜만이네...'

어색함이 싫었는지 강소영이 먼저 웃으면서 말을 건넨다. 더 예뻐졌네. 대학생 되니까 패션부터가 달라

진 것 같고. 그런데 대단하다 너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흔한 친구였던 것처럼 말을 건넬 수 있는 거야?

네가 있는 줄 알았으면 나는 여기 오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눈 마주치고 쳐다보지 말아줘. 나는 아직 예

전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단 말이야.

'응 오랜만이다 소영아.'

분위기가 어색한 걸 눈치챘는지 민석이가 날 끌어당겨서 다른 테이블로 데리고 간다..

'야 어디 숨어있었어? 이 자식. 저기 너 술 먹이려고 안달 난 애들 많으니까 도망칠 생각하지 말고 빨리 

오지?'

민석이 덕에 나는 그 테이블에서 발을 뗄 수 있었다. 다른 쪽 테이블로 가면서 민석이가 말한다.

'소영이도 동창회 할 때마다 자주 참석했어. 너한테 말해줄 걸 그랬다. 괜찮지 너?'

'응.. 뭐 다 옛날 일인데, 근데 좀 어색하긴 하다. 저쪽 테이블 다시 갈 용기는 안 나.'

원래 있던 테이블로 가 앉는다. 거기서 친하게 지냈던 동창들 몇 명과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빨리 강소

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김창수가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에 신이 나서 말을 늘어놓는다.

'너희들 그 영어 선생 알지? 이티 말이야 이티. 우리 그때 단체로 야자 땡 까고 도망치다가 이티한테 걸려

서 완전 혼났었잖아. 부모님한테까지 연락 다 돌리고. 나랑 성민이랑 대표로 50대씩 대걸레

봉으로 얻어맞고.'

'맞아. 여자애들 울고 난리 났었지. 김기웅 선생님이지? 오랜만에 보고 싶다. 뭐 하시냐 요즘?'

'다른 학교로 전근 가셨어. 그래도 우리 많이 예뻐했었는데.'

고등학교 때 추억은 얘기해도 얘기해도 끝이 없다. 생각해보면,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든다. 우리는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계속 그 술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끊임없이 소주와 맥주잔

이 오고 갔다. 벌써 취한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한둘이 아니다. 술이 센 편인 나도 약간 취기가 돌

정도였다. 어? 김창수 너도 완전히 취했네 아까 우리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창수야 괜찮아?'

'어... 아 완전 많이 마셨네. 다리 힘 빠졌다. 야 나 좀 부축해 주라.'

나는 김창수를 부축해준다.

'야 잠깐 밖에 나가자. 너 바람 좀 쐬어야겠다.'

부축해서 밖으로 나가려는데 앞에 있는 화장실에서 누군가 나온다. 강소영이다. 나랑 취한 창수를

보더니 놀라는 표정이다. 아씨. 일부러 다시 안 보려고 했는데 왜 또 너랑 마주치지?

'야 너네 괜찮아..? 둘이 옷에 뭐가 그렇게 많이 묻었어? 잠깐만.'

강소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기 손수건을 꺼내서 우리 둘 옷을 털어준다. 소영아, 제발 이러지 마. 넌

안 어색해 지금? 나 너랑 마주 볼 자신이 없어. 머리가 복잡하단 말이야 정말로

'괜찮아. 안 그래도 돼 나 잠깐 창수랑 밖에 나갔다 올게. 애들이랑 잘 놀고 있어.'

창수를 데리고 술집 밖으로 나가자 몇몇 동창들이 밖에서 전화를 받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성민아, 지금 속이 완전 쉣이다. 애들 없는데, 저 골목으로 좀 가자

골목으로 가자마자 창수는 구석에서 구역질을 한다. 나는 말없이 뒤에서 등을 두드려준다. 원래 잘

안 취하고 자기 관리 잘하는 녀석이 오늘 왜 이래?

구토가 끝나자 나는 창수에게 근처 편의점에서 여명 808하나를 사서 건네주었다. 창수가 숨을 한번

내쉬더니 그걸 마신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다.

'성민아. 나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마침 잘 됐다. 말해도 되지?'

'당연하지 무슨 말인데 인마. 걱정하지 말고 해 다 들어줄게.'

창수는 나를 한번 쓱 쳐다보더니 결심했다는 듯 이야기를 꺼낸다.

'나......... 소영이 좋아했었잖아. 아무한테도 말 못했어도, 너한테는 말한 거 같은데.. 기억나지? 요즘에 나

소영이랑 만난다. 사귀지는 않는데, 만나고는 있어. 저번 동창회에서 만난 뒤로 연락했거든. 너 이제

소영이랑 안 사귀는 거 맞지? 나... 이래도 괜찮은 거냐?'

갑자기 머릿속에서 무언가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추억 저편에 숨어져있던 기억들이 내 의사

는 묻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다가온다. 그래, 지금 이 장면 낯이 익다. 분명 똑같은 상황이었어. 내 기억

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던 파노라마는 2002년의 어느 시점에서 정확히 멈추어 선다. 월드컵으로 우리들

이 한껏 흥분해 있었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다.

#9. 2002년 6월 4일, 그 후.

내 기억 속에서 멈춰 선 파노라마는 그 시점부터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억지로 숨겨둔 채 생

각하지 않았던 기억이라서 그런가? 마치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곳에 노출된 것처럼 눈이 부시다.

하지만 점차 적응이 된다.

한일 월드컵의 열기로 온 나라가 뜨겁다. 거리 곳곳에 사람들이 몰려나와 응원을 펼치고 노래를 부른다.

환희와 생동감이 넘친다는 표현이 옳다. 그렇게 폴란드전을 앞둔 6월 4일, 국가대표 선수도 아닌 주제

에 나는 내 방에서 휴대폰을 붙잡고 초조해하고 있다. 그냥 문자로 보낼까? 아니야. 찌질해 보여 그건

남자답게 눈 딱 감고 전화하자 그런데.. 거절당하면 쪽팔릴 거 같아. 그래 애초에 기대를 하지 말고 전

화해보자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손해 볼 건 없는 거잖아? 나 자신을 합리화 시켜보자. 거절당했을 

때의 쪽팔림과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는 도피처를 일단 마련해 두 자. 안되더라도 쿨하게 가는 거다. 최

성민.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거지? 생각할 시간 좀 더 주지. 이러다 경기 시작하겠다. 그냥 친구 놈들이랑

같이 볼까? 제발. 나약한 생각 집어치우자. 그냥 통화 버튼 누르자 이 쿨하지 못한 녀석아.

강소영이라고 등록된 번호로 신호가 간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여보세요?'

'어.... 소영아! 나야 성민이 너 지금 집이야?'

'응. 너한테 전화 온 거 처음인 거 같다 야. 무슨 일이야?'

'오늘 축구하잖아 광화문에 거리응원하러 안 갈래?'

내 입에서 왜 '안 갈래?'라는 말이 나왔을까. '가자!'라고 확신 있게 말했어야지. 이런 사소한 게 분위기

를 좌우한다고 정신 좀 차리자.

'거리응원? 누구누구 가는데?'

'아... 그게.... 그냥 주변에 사는 애들 몇 명 불러도 되는 거고, 그냥 만나서 생각해봐도 될 거 같은데...'

바보 같은 놈. 정말 말리고 있어 지금. 단둘이 보자고 단호하게 말하면 안 되는 거니?

'근데 나 지금 동생 숙제 도와주고 있어서... 늦어질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아...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동생 숙제 잘 도와주고... 학교에서 보자.'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냥 전화하지 말고 친구 놈들이랑 축구나 보러 갈 거 그랬

나. 와 근데 은근히 기분 다운된다. 아니야. 동생 숙제 도와줘야 한다잖아. 그냥 쿨하게 넘어가자.

아씨, 지질하게 보였으면 어쩌지? 그래 내 주제에 무슨 강소영이냐 그냥 남자 놈들이랑 어울려서 누구

는 개발이네 히딩크가 어쩌네 하면서 축구나 보자 나가자.

그런데 왠지 발걸음이 잘 안 떨어진다. 세수하고 거실 소파에 앉아서 눈을 감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

고 있는데 계속해서 쪽팔린 생각이 든다. 가만히 있으니까 어째 잡생각만 드는 거 같다. 빨리 몸을 움직

여야지. 어디서 빨간 티 하나를 꺼내 입고. 나는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탄다.

벌써 폴란드 전이 시작했는지, 함성이 엄청나다 친구 놈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갑자기 휴대폰이 울린다.

정말이지 그 연락은 의외였다. 아니 의외라기보단 기뻤다. 그보다 더 떨리는 느낌의 전화가 내 생애에

있었을까?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주변이 시끄러워서 한쪽 귀를 막은 채로.

'어 소영아 왜?'

'나 방금 동생 숙제 다 끝났어. 와 거기 광화문이야? 엄청 시끄럽다. 지금 가도 돼?'

아싸 다행이다. 그럼 당연히 와도 되지. 민석아 미안한데 좀 이따가 봐야겠다. 형님이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말이야.

'응 지하철 출구 앞에서 기다릴게. 도착하면 연락해'

'빨간색 옷 입어야 되는 거야? 사람들 다 빨간색 옷 입고 있지?'

'그냥 티셔츠만 빨간색으로 입고 와.'

나는 그렇게 폴란드전이 시작된 얼마 뒤에 광화문에서 강소영을 만났다. 청치마에 빨간색 티셔츠. 아

직까지도 그 모습이 생생하다. 강소영은 나 혼자만 기다리고 있는 게 처음에는 조금 어색한 눈치였지

만, 이내 재밌게 응원하고 축구를 봤다. 나는 축구 규칙을 잘 모르는 소영이에게 뭔가 아는척하면서

설명을 해준다. 즐겁다. 이런 기분.

결국 한국이 폴란드를 2:0으로 누르고 월드컵 첫승을 기록한다. 거리 응원을 나왔던. 사람들은 서로 부

둥켜 안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다. 그래, 나도 정말 기분이 좋다. 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너와

단둘이 이렇게 밖에서 만난 건 처음이니까. 너랑 이렇게 웃고 떠든 것도 처음이니까.

던킨도넛에서 시원한 걸 마시면서, 우리 둘은 계속 축구 얘기를 했다.

'와 진짜 감동적이야. 난 축구 한 번도 안 해보고 축구 규칙도 잘 몰랐거든. 너 때문에 많이 배운 거 같아.'

'그치? 16강 갈 수 있을 거 같아. 사람들 이렇게 많이 나올지 몰랐는데 정말 많더라.'

강소영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거 같은 기분이었다. 고작 한번같이 만난 주

제에.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나는 오늘 그 자체로 즐거우니까.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오자마자. 임

원 회의에서 강소영을 만났고 한눈에 반했다. 변변히 말도 못 붙이다가. 우연히 학교 행사를 같이 준비

하게 되면서 전화번호도 알게 되고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거.

그것만으로도 만족해. 나는.

민석이한테 한번 더 연락이 온다. 이 녀석 진짜 보채네 알았다 알았어.

'야 너 어디야? 답문도 안 하고 축구 다 끝날 때까지 어디 있었어? 첫승이다 첫승!'

'아 그럴 일이 좀 있었다. 지금 어디냐? 몇 명정도 모였어?'

'다섯 명 모여있다. 빨리 와 이 형님이 다 세팅해놨으니까.'

친구들이 있는 공원으로 가니 벌써 치킨도 시켜놓고 난리도 아니다. 월드컵 첫승으로 다들 흥분해 있

다. 내가 그쪽으로 가서 앉자 누가 내 어깨를 툭하고 친다. 김창수다.

'같이 좀 보지. 어디 가 있었어? 오늘 응원할 때 대박이었는데. 우리 옆에 정말 예쁜 대학생 누나들 있었

다. 골 넣고 나서 정말 기뻐서 서로 끌어안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민석이 저놈이 일부러 그 누나들

옆에서 예쁨받고 장난도 아니었어. 부럽지 부럽지?'

근데 별로 안 부럽네? 내 옆에도 예쁜 여자가 있었단다. 아니다... 나는 네가 부럽다 창수야.

김창수는 대단한 놈이다. 중학교 때부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데도. 별로

범생이 티가 나지 않는 녀석이다. 우리 고등학교는 그다지 유명한 고등학교가 아니었다. 때문에 이 학교

를 배정받고 나서 나는. 문과 남자들 중에서는 적어도 1등을 할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나와 같은 중

학교를 다닌 친구들도 내가 1등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은 틀렸다. 나는 전교 등수는 그럭저럭 나왔지만. 항상 반에선 1등을 하지 못 했다. 내 위에

는 언제나 김창수가 있었다. 내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저 녀석 별로 열심히 하지도 않는 거 같은

데, 어떻게 된 거지? 원래부터 머리가 좋은 건가. 나는 김창수보다 훨씬 더 열심히 공부했다. 창수를 한

번 이겨 보고 싶었다. 예비 형식으로 치른 사설 모의고사에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생 치고는 높은 점수

를 받았지만 채점을 마친 김창수의 점수는 나보다 20점이 높았다. 그건 그 모의고사를 치른 전국에서

10등 안에 드는 점수였다. 반장 선거에서도 김창수는 항상 반장이고 나는 부반장이었다. 인정하기 싫지

만, 나는 노력파였고 김창수는 천재였다. 내 마음속에서는 그렇게 김창수를 향한 라이벌 의식이 싹텄

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새 친한 친구가 됐다. 친구를 향한 우정과 경쟁의식. 그런 관념이 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야 인마. 이 형님이 뭘 가져왔는지 잘 봐라.'

민석이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양주인 건 확실했다.

'어? 그거 양주잖아. 어디서 낫냐?'

'우리 집에서 몰래 가져왔다. 자 누구부터 마셔볼래?'

당시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생에 불과했다. 술을 마셔본 경험이 있더라도 취할 때까지 많이 마셔본 일

은 없었고 게다가 양주를 마셔본 애들도 거의 없었다. 우리는 서로 주저했다. 그때 김창수가 나섰다.

'야 내가 한번 마셔볼게.'

역시 이런 일에서조차, 너는 나를 한발 앞서는구나. 김창수는 겁도 없이 양주를 종이컵에 따라서 벌컥

벌컥 바셨다. 다른 녀석들도 그제야 조금씩 따라서 양주 맛을 보기 시작한다. 다들 얼굴을 찡그린다.

'아 써 무슨 맛이 이러냐? 우리 아버진 이거 잘 마시던데. 목구멍이 정말 타는 거 같아.'

창수야 너는 괜찮니? 너 설마 술까지 센 거야?

하지만, 김창수도 양주를 한 번에 원샷하고 멀쩡할 정도로 술이 센 녀석은 아니었다. 얼굴이 빨갛게 되어

속이 안 좋은지 가슴 언저리를 주먹으로 친다.

'아 이거 갑자기 술기운 올라온다. 나 토해야겠어.'

창수는 공원 화장실로 가서 구역질을 시작했다. 내가 따라가서 등을 두드려 준다. 한 10분쯤 됐을까.

속이 좀 괜찮아졌는지 침을 한번 뱉고 옆에 있는 벤치로 가 앉는다.

'아 더럽게 어지럽네 다시는 안 마셔야지. 성민아 너는 괜찮냐?'

'난 조금밖에 안 마셔서 그러길래 뭘 그렇게 한 번에 원샷 해버리냐 자식아'

'그러게 토하니까 좀 낫네 야 성민아. 너밖에 없어서 하는 말인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오케이?'

'뭔데? 나 입 무거운 거 모르냐?'

'나 6반 강소영 좋아한다. 임원회의 때 처음 봤는데 완전 내 스타일이더라고. 너도 걔 알지?'

'어? 응...'

그럼 알지 강소영 왜 그랬는지 몰라도 솔직히 나는 그때 형태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멋있는

녀석이지 김창수. 이 녀석이 소영이를 좋아한다고? 오늘 강소영을 만나서 좋았던 기분이 일순간에 싹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다. 혼란스럽다. 걱정스럽다.

'야, 나 나중에라도 고백하게 되면 좀 도와주라. 알았지?'

창수가 기억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때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미안해 그런데 그렇게는 못하게

어. 나랑 소영이랑 잘 될 수도 있단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소영이를 포기할 수는 없어. 만약에 네가

우리 사이에 끼어든다면,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거야. 넌 정말 대단하고 인기도 많은 녀석이잖아.

꼭 강소영이 아니어도 되잖아.

그날 이후로 나는 더욱 적극적으로 소영이에게 연락하고 만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백했다. 너를 좋

아한다고. 사귀고 싶다고 너랑 꼭 사귀어야 한다고. 이번에는 정말이지 단호했고 어물쩍 거리지도 안

았다.

그렇게 나는 강소영과 사귀게 됐다. 나는 소영이가 고백을 받아들인 그 시점에서도 김창수 생각이 났

다. 미안했다. 아니,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김창수는 어떻게 행동할까? 우리 사이에 혹시 끼어들지

는 않을까?

그러나 내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괜한 걱정이고 괜한 억측이었다. 그래 돌아보면 내가 못난 놈이

었다. 창수는 사랑보다는 우정을 중요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영이와 사귄 뒤 처음 며칠간은 나

와 김창수의 사이가 어색했지만. 어느새 친한 친구 사이로 되돌아갔다. 김창수는 나와 소영이 사이에

끼어들기는커녕 소영이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나를 위한 배려였다. 오히려 소영이가 멋모르고 김

창수에게 인사 걸고 친한 척해도 창수는 무덤덤했다.

'야 김창수 애가 뭐 그러냐? 인사해도 잘 받아주지도 않고. 걔 나 싫어 하나?'

아니, 그 반대야 소영아.

김창수는 나와 이야기할 때, 더 이상 소영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보다 더 의외였던 것은 김창수

가 고등학교 3년 동안 거의 여자를 사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 김창수는 주

변에 여자가 많은데도 아무도 사귀지를 않는 거지? 김창수를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수줍게 고백을 해도

여 후배들이 반까지 찾아와 초콜릿을 건네고, 직접 만든 쿠션을 주면서 좋아한다고 해도. 김창수는 이

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학년 때 한 학교 후배와 드디어 사귀게 됐지만 그 관계는 채 한 달도 이어지지

못 했다.

그래, 내가 왜 지금에야 이걸 깨달았을까? 그놈은 역시 대단한 녀석이었다. 녀석은 강소영을 좋아하는

마음을 끝내 접지 못 했다. 하지만 친한 친구를 위해 양보를 하고 있었다. 친한 친구의 사랑에 끼어들만

큼 김창수는 비열한 놈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창수에게 경쟁의식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했지

만, 알고 보면 김창수는 날 위해 자기의 감정마저 포기해버릴 수 있는 놈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예상대로 김창수는 서울대에 합격했다. 나는 서울대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결과

는 합격하기 힘든 대기번호였다. 나는 주저 없이 재수를 결정했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소영이도 만류

했지만, 나는 확고했다. 친한 친구이자 라이벌인 창수에게 지기 싫었다.

파노라마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다. 골목길이다.

창수가 그런 김창수가 2002년 그날 이후 4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어렵게 소영이 이야기를 꺼내고 있

다. 나는 창수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지?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 솔직히 창수와 소영이가 사귄

다면, 편하게 바라볼 수 있을 거 같지는 않다. 그게 어쩔 수 없는 내 마음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내

기억의 굴레에 김창수와 강소영을 가둬둘 수가 없다.

'나 소영이랑 깨진지 1년도 넘었잖냐. 뭐 네가 알아서 하는 거지 나는 상관 안 해.'

김창수와 나는 그렇게 잠시 동안 서로를 쳐다보았다.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창수가 비틀거리면 일어선

다.

'휴... 그래도 너한테 말하니까 속이 좀 편해진다. 야 나 이만 집에 가야겠다. 들어가자.'

'응 난 잠깐만 여기 앉아있다가 들어갈게 잘 가라 또 보자.'

다시 머리가 복잡해진다. 멍하게 하늘을 쳐다본다.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별반 달라지는 건 없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나는 가방을 챙기기 위해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래. 집에 가자. 빨리 잠이나

자자. 술집에서 가방을 챙기는데 누군가 다가온다. 소영이다.

'성민아, 지금 가는 거야? 저기... 잠깐 이야기해도 돼? 오랜만에 봤는데.... 말도 못했네....'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나는 소영이에게 화가 난 얼굴로 이렇게 몰아세웠다.

'야 강소영! 왜 그래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 너한테 할 말 없어. 이제는 네 얼굴 보기도 싫고 그만하

자. 우리 제발.'

사실 그렇게까지 흥분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 강소영의 표정을 돌아

보지도 않고 나는 술집을 나와버렸다. 요즘에 손시연을 만나서 얼마나 행복했었는데.... 가슴이 답답했

다. 재수시절, 나는 강소영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처음으로 담배를 피웠다. 하지만 이내 끊었다. 그런 것

때문에 담배를 피우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다시 담배가 피우고 싶다.

나는 건물 앞에서 담배를 대여섯 개피나 연속으로 피우고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이미 배터리가 나간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나는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자고 싶다.

#10. 고열

그렇게 나는 아팠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혼자서 아프다는 거 이렇게 서러운 거구나. 나는 집 밖

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하숙집 침대에서 계속 누워만 있었다. 혹시나 해서 서랍을 뒤져 예전에 약국에

서 사다 놓은 감기약을 한통 다 먹다시피 했지만 효과가 없다. 병원에 가야 할 텐데. 귀찮다. 아니, 일어

설 기운조차 없다.

지금 몇 시지? 무슨 요일일까? 헬스장도, 학원에도 며칠간 못 갔겠네. 그래도 일어나야 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있을 수는 없다.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서 화장실로 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찬물이 피부에

닿으면서 흐물흐물 늘어져 있던 내 감각을 깨운다.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다.

안 피우던 담배를 피워서 그런가? 입이 텁텁하고 목도 답답하다. 나는 물컵에 찬물을 따라서 마시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저쪽에 던져두었던 휴대폰부터 충전기에 연결한다. 종료 버튼을 길게 꾹 누른

다. 월요일 밤 10시 오래도 누워있었구나.

휴대폰에서 연달아 진동이 울렸다. 그동안 밀렸던 문자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느라 아우성이다. 이봐

뭐 하다가 이제야 켜는 거야? 마치 이렇게 보채기라도 하는 것 같다. 잘 들어갔냐는 고등학교 친구

들의 문자와 반 친구들의 문자 언제 집에 내려오느냐는 어머니의 문자도 도착해있다. 나에게 특별한

문자도 하나 도착해있다. 손시연으로 부터다.

[아저씨 동창회 재밌었어요~?ㅎ]

일요일 점심 즈음에 도착했던 문자다. 내가 문자를 씹어버린 꼴이 되었네. 미안해

[폰이 꺼져있었어. 미안 지금 확인했네. 동창회 재밌었지~ 학교 잘다녀왔....]

다시 한 번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아 미치겠네. 정말 많이도 밀려 있었군. 손시연에게 문자를 마저 보

내고 새로 온 문자를 확인한다 하.. 어떡하지? 이번엔 강소영이다. 물론 소영이의 번호는 내 전화 목

록에서 예전에 지워버렸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전화번호까지 다 지워지지 않은 모양이다.

[잘 들어갔어...? 나 그날 정말 놀랐어..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이 문자 보면 연락해줘..]

제발. 내가 도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나랑 지금 뭐 하자는 거니? 대

학가더니 어장관리, 뭐 이런 거 하는 거야 지금? 내가 그렇게 바보 같아 보여? 넌 이렇게 쉽게 문자 보내

고 쉽게 말 걸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안 그래

재수 시작하면서 너한테 이별 통보받고 정말 힘들었어. 거의 한 달 동안 공부도 제대로 못했다고. 매일 밤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다짐했어. 너를 완전히 잊어버리겠다고. 너에 대한 감정이나, 함께 했던

기억 같은 것도 다 지워 버리겠다고. 너랑 마주쳐도 쳐다보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널 내가 가슴속에서 밀어내자고 그렇게 겨우 조금씩 잊어갈 수 있었단 말이야 너를.

나는 착각했어. 내가 너와 나 사이를 주도한다고 생각했어. 넌 항상 내가 하자는 데로 잘 따라주는 편이

었고 내 기분도 잘 이해해 주려 노력했거든. 한 번도 큰 소리 내거나 화낸 적도 없었고. 그런데 아니야 우

리 사이의 주도권은 너에게 있었어. 난 약자였어. 네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나는 반응해야 했고, 신경

써야 했고 가슴 아파야 했어. 네 생각에 괴로워하고 너를 잊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어. 그러니까 제발 그

만 하자 우리. 또 한번 너한테 화내기 싫어 정말이야. 우리 앞으로 더 이상 연락하지 말고 보지도 말자.

꼭 그렇게 하자...

또다시 진동이 울린다. 이번엔 좀 더 길게 울리는 진동이다. 손시연이네 아 정신없다. 정말 신경이 날

키로워져서 그런가. 진동이 한 번씩 울릴 때마다 어지러워.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난 언제나 건강한 놈이

었는데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여보세요?'

'어 아저씨다. 며칠 동안 폰 꺼놓고 뭐 했어요?'

미안하다 손시연 네 얼굴 바라보고 네 문자 볼 때마다 좋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좀 여유가 없어. 내가

내일쯤 다시 연락하면 안 될까?

'응... 좀 피곤해서 자고 있었어. 넌 뭐 해..?'

'어? 아저씨 목소리가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와 귀신이구나. 응, 조금 아프네. 식상한 표현인 줄 알았는데. 정말 그래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파.

'아.... 아니, 자다가 일어나서 그런가 봐 괜찮아.'

'그래요? 근데 왜 그렇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들리지? 아저씨 아프죠?'

'아니야 괜찮다니까... 무슨 일로 연락했어?'

'아프면, 병원 가요. 그냥 누워있으면 안 돼요.'

'안 아프다고. 안 아프다는데 대체 왜 그래!'

이런, 생각보다 목소리가 컸다. 아 진짜 못난 놈이다. 나 왜 아무 잘못 없는 손시연한테 이래. 바보 같

은 녀석아 어서 사과해 네 기분대로 상대방한테 아무렇게나 내뱉지 말란 말이야,

'아니 아저씨. 웃긴다 밑도 끝도 없이 왜 성질이에요. 갑자기?'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너도 한 성깔 있는 앤데... 너무 내 기분만 생각했나 봐.

'아.. 미안 미안해 아팠었는데 지금은 나아졌어. 신경이 좀 날카로워서 그런가 봐. 화난 거 아니지? 목

소리 높여서 정말 미안. 아까 화낸 거 취소할게. 지금 어디야?'

왜 대답 안 해? 어..? 전화 끊어졌다. 어쩌지? 얘 삐졌나 보다. 하기야 안 삐지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나름 걱정해서 전화해줬는데. 다짜고짜 성질이나 부리는 녀석을 누가 좋아하겠어? 손시연 말 틀린 게 하

나 없네. 네가 아니라 내가 진상이다. 진짜 이런 게 진상이 아니면 대체 뭐가 진상이겠니..

나는 마지막 남은 해열제를 입에다 털어 넣고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힘없이 눈을 뜬다. 다행이다 어제에 비해서 훨씬 괜찮아졌다. 정말 불타는 것

같던 열도 조금 내려간 느낌이다. 며칠만 지나면 다 나을 것 같다. 아까 분명히 모닝콜 끄고 다시 누웠는

데, 누구지? 어, 손시연이네. 점심인데 무슨 일일까? 나한테 한판 쏘아붙이려고 그러는 건가? 그래. 차

라리 그렇게 해. 그래야 네 속도 편해지고 내 속도 좀 편해지겠어.

'응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아저씨 집이죠? 저 지금 신촌 가는 중이에요.'

'어? 지금? 너 어디쯤인데?'

'거의 다 왔어요. 15분이면 도착해요. 집 앞으로 갈게요. 내가 연락하면 나와요. 알았죠?'

다행히 화내지는 않네 성질 많이 죽었구나 손에 연 약속도 안 했는데 여길 왜 왔지? 내가 몸 좀 괜찮아

지면 다시 연락하려고 했는데.

세수만 대충 하고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머리도 감을까 하다가 시간이 애매할 것 같아서 모자만 푹 눌

러 썼다. 집 밖으로 나가니까 벌써 손시연이 기다리고 있다.

'아저씨 진짜 아파 보인다. 안 그래도 삭은 얼굴 더 삭아 보여요.'

제발 그런 걱정스러운 표정 지으면서 갈구지 좀 마.

'걱정 마. 다 나았어. 야 어디 가서 좀 앉자.'

나는 손시연을 근처 할리스커피로 데려갔다. 근데 너 아까부터 계속 뭘 그렇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

꾸 쳐다봐?

'아저씨 완전히 초췌해요. 지금 병든 동.... 아니... 음.. 뭐랄까... 병든 짐승 같아요. 나랑 병원 갈래요?'

너 분명히 '동물'이라고 하려다가 '짐승'으로 말 바꿨어. 꼭 그런 어휘를 선택해야 돼? 와.. 몸도 안 좋은

데 기분 정말로 좋게 만든다. 눈물 나게 고마워. 너 저번에 내가 잡식동물이라 그래서 복수하는 거지?

'병원은 무슨. 괜찮다니깐. 며칠 동안 조금 열나고 그랬는데. 지금 다 나았어.'

'아니에요. 나 생각보다 힘 안 세서. 아저씨 쓰러지면 못 업고 가거든요? 아 약국 가면 되겠다! 열난다 그

했죠? 잠깐만 기다려요.'

그럴 필요까진 없어. 갑자기 왜 이렇게 허겁지겁 이래? 누구 응급실이라도 실려가는 줄 알겠다. 야야

그렇게 막무가내로 뛰어가지 마. 보는 내가 걱정스럽다. 넘어지겠어. 이러다가 내가 널 업고 가야 될 거

같아. 잠시 뒤 약국에 갔던 손시연이 다시 돌아온다. 그런데 빈손이다.

'웅... 미안요. 지갑에 천원 밖에 없어요. 돈 좀 빌려줘요. 나중에 꼭 갚을게요. 알았죠?'

내 이럴 줄 알았다. 내가 아픈데 내 돈 내고 약 사 먹어야지 어쩌겠냐.

'야 그냥 내가 사 올게.'

'기왕 사 오기로 한 거, 내가 사 올게요. 3분 안에 갔다 오겠음.'

막무가내네.. 자 여기. 아니, 근데 네 지갑은 왜 나한테 주고 가? 무슨 물물교환하니 지금?

이번에는 빈손이 아니다. 손시연은 봉지에다 정말 이것저것 여러 종류의 약을 담아왔다. 고마워. 정

말 고맙기는 한데. 왜 이렇게 생명에 위협이 느껴질까? 너 약장사하는 거 같아. 저걸 다 먹었다가는 병

을 고치기는커녕 약에 중독되겠다. 누구 약 중독자 만들려고 그래?

어라, 너 또 왜 이렇게 정신없게 그래? 뭐 잃어버렸어?

'아 짜증 나. 지갑 놓고 왔나 보다. 약국 또 갔다 와야겠네. 아저씨 잠깐만...'

휴... 너 지갑이라면 내가 가지고 있다만.

'야 스톱. 여깄어 여기 좀 진정하지?'

'언제 남의 지갑은 가져갔어요?'

말을 말자 갑자기 또 어지러워지려 그래. 너 정말 걱정돼서 온 거 맞아?

'약사 선생님이 이건 밥 먹고 30분 후에 한 알씩이고, 이건 뜨겁게 데워서 먹으면 되고... 이건 밤에 열나

면먹으면 된데요. 아! 그리고 이건 지금 먹으면 된데요.'

너 완전히 팔랑귀구나? 그 약사 자식은 왜 어린애 꼬드겨서 저렇게 약을 많이 팔아먹은 거야?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손시연, 너 수학여행 때 잡상인들 말 곧이곧대로 믿고 물건 사는 스타일이구나.

'이거 먹으라니까요?'

손시연이 내 눈앞에다 웬 약 숟가락을 하나 들이민다. 약에서 딸기향이 난다. 야 이건 아니잖아.

'이거 애들 먹는 감기 시럽이잖아. 됐어. 내가 이 나이에 이거 먹게 생겼냐?'

'어...? 나 저번에 열났을 때, 아빠가 비슷한 거 사다 줘서 먹었는데?'

'네가 그러니까 꼬꼬마지. 어른들은 이런 거 안 먹어.'

'참나. 사다 줘도 뭐라고 그러네. 알았어요. 먹지 마요.'

휴... 알았어. 먹을게. 설마 약 많이 먹는다고 죽기야 하겠냐. 먹자 먹어

'아저씨. 나 누구 아픈 거 진짜 싫어 한단 말이에요.'

가만, 너 또 진지한 표정 짓는다?

그래. 말하지 않아도 알 거 같아 나. 그러고 보니 나도 똑같아. 가족 중에서 누구 한 명을 잃어보니까.

어렸을 때부터 누가 아픈 게 정말 싫었어. 어머니가 아파서 누워만 계셔도 정말 불안했고. 또다시

내가 아끼는 사람이 나를 떠나갈까 봐. 슬프다는 소리도 못 내고 또 그걸 무력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봐.

하다못해 대학 친구들 중에 누가 아파도 약국 가서 약이라도 사다 줘야지 직성이 풀렸어. 너도 그렇구

나? 게다가 너는 중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며. 그럴 만도 하지 이해해 그 기분. 아무튼 고맙다. 이

이렇게라도 신경 써줘서. 혼자라는 기분 들지 않게 해줘서.

잠깐만. 근데.. 얘가 갑자기 왜 이렇게 킁킁 거려? 냄새나니? 미안 나 요즘에 아파서 샤워할 힘도 없었다

구 그러니까 그렇게 불결한 물건 쳐다보듯이 바라보지 좀 말지?

'아저씨. 요즘에 씻지도 않았죠? 땀 냄새 진짜 난다. 웩. 수염 봐 원숭이 같아. 정말 지저분하다. 혼자 사

는 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아까 일어나서 샤워하고 면도도 하려고 했는데, 네가 전화했잖아.'

'아저씨. 아무리 아프더라도 최소한 인간답게는 살아야죠. 좀 씻고 살아요.'

내가 대체 왜 이 어린 것한테 인간답게 살 것을 훈계 받고 있는 걸까. 안 그래도 아파서 서러워 죽겠는

데. 꼭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 알았어. 앞으로 인간답게 살게. 됐지?

'아저씨. 나 곧바로 학교 가봐야 돼요. 지금 점심시간에 나온 거란 말이에요. 혼자 산다고 라면 같은 거 먹

지 말고 밥 좀 잘 챙겨 먹어요. 저 갈게요.'

너 점심시간에 나온 거였어? 이런, 괜히 아픈 거 티 냈나 봐 나. 무슨 양로원 할아버지가 봉사활동 나온 여

대생 만나러 온 거 같은 기분이야 지금.

'수업 안 끝났어? 그럼 뭣하러 학교에서 여기까지 왔어? 너 점심은 다 먹고 나온 거야?'

'남 걱정하지 말고 아저씨나 걱정하시죠? 전 팔팔하거든요? 늙어서 아프기나 하구.'

그래. 다 부실한 내 잘못이다. 나는 할리스 커피 앞에서 택시를 잡아서 손시연을 태워 보냈다.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웃기는 일이다. 그날 밤 머리를 찌르던 두통도, 온몸에 나던 열도 씻은 듯이 다

사라졌다. 그 약사가 손시연을 꼬드겨서 팔아치운 약 때문에 그런 건 아닐 텐데. 어쨌든 나는 오래간만에 편

하게 두발 뻗고 잘 수가 있었다.


posted by 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