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네 손

토익학원이 끝났다. 같이 수업을 듣는 여학생이 고맙다는 말과 함께 빌려 갔던 펜을 돌려준다. 우리 학교

학생 이랬지? 예쁘네. 예전 같으면 괜히 신경 쓰이고 두근거리고 했을 텐데.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내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나는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왔다. 오늘 헬스는 생략해야 한다. 지겹고 식상하기만 했던 신촌도 이제

달라 보인다. 늘 그 자리에 그렇게 매달려 있는 간판도, 얼룩덜룩한 아스팔트도 신선하게만 느껴진다.

정말이지 새롭다. 웃고 떠들며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괜히 따라 웃고 싶은 생각이 든

다. 혹시 문자라도 도착해있지 않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휴대폰을 수시로 확인해본다. 그때 전화가

울린다. 손시연은 아니고, 고등학교 동창 하얀이다.

'어. 정하얀! 갑자기 웬 전화질이야?'

'총무님이 전화하시는데 황송해 해야지 전화질이라니. 뭐 하냐 지금?'

'아, 나 지금 학원 끝나고 어디 가려고 하는 중인데. 왜?'

'너 신촌에서 산다며? 나 요즘에 홍대 근처에서 아르바이트하잖냐. 오늘 시간 돼? 밥이나 먹자.'

'아, 오늘은 일 있어서 안되는데. 너 언제 언제 일하는데. 금요일에 볼까?'

'오, 무슨 일? 너 혹시 여자 만나? 수상한데?'

미안하다 하얀아. 나 오늘 만날 사람이 있거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오늘은 손시연이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다. 시험 끝난 기념으로 만나자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사

실 시험 때문에 만나는 건 아니다. 남녀 사이에서 만나야 할 이유를 찾는 건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냥 만나고 싶다. 그리고 보고 싶다.

고등학교 앞에 도착했다. 벌써 몇 명은 나오고 있네. 와 쟤네는 고등학생이 저게 뭐니? 치마는 왜 저렇

게 줄여 입고 화장은 또 왜 저렇게 짙을까. 옆에 있는 남자애들은 또 뭐야. 정말 놀게 생겼어. 어린놈들

이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근데 나도 솔직히 할 말은 없구나. 아 저기 나온다. 손시연. 다행이다. 딱 맞

춰서 왔어. 이번에는 안 늦었네.

'정말 어려웠어요. 시험. 아저씨 땜에 점수도 못 맞춰보고 왔는데.'

그래. 콩깍지가 씌워서 그런 건진 몰라도 아까 교복 줄여 입고 그런 애들보다는 네가 훨씬 낫다. 잠깐만. 시

험 끝난 애가 왜 이렇게 샤방샤방해? 좀 쩔어있고 피곤한 얼굴을 해야 정상 아니야?

'야, 너 왜 이렇게 멀쩡해? 시험공부 안 했어?'

'아뇨. 열심히 했는데요? 며칠 동안 컨디션 관리하느라 잠을 좀 많이 자서 그래요.'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컨디션 관리한다고 공부 안 하지... 이러면 네가 또 삐지겠지? 그래. 건강한 게 최

고지. 뭘 더 바라겠냐

'오늘 우리 학교 놀러 가자. 너 연대 가봤어?'

'재밌겠다. 한번 가보기는 했는데 자세히 둘러보지는 못했어요. 그전에 우리 집 잠깐만 들려요. 옷 갈

아 입게. 대학교에 교복 입고 가면 정말 쪽팔리잖아요.'

'거기에 너한테 관심 있는 사람 아무도 없거든? 그냥 가지?'

'참내. 그냥 자기만족하려 그래요. 자기만족. 됐어요?'

그래. 네가 너 혼자 만족하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니. 사복 입어라 입어

그러고 보니 처음으로 너희 집 앞까지 온 거 같아. 나름 예쁜 주택이네? 여기서 아빠랑 동생이랑 셋이서

사는 거야? 와. 나한테 몇 평만 떼어주지. 안 그래도 하숙집 좁아터져서 답답해 죽겠는데.

'아저씨. 나왔어요. 초스피드죠?'

초스피드기는. 나 지금 20분이나 기다린 거 알아? 근데 나 진짜 콩깍지 씌웠나 봐. 오늘 정말 예뻐 보인

다 너. 티도 잘 어울리고 청바지도 잘 어울려.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거 같아. 오늘은.

'교복 입으나 사복이나 똑같구만. 옷 바꿔 입는다고 외모가 개선되는 건 아니거든?'

'와. 이 아저씨가 어디서 외모 지적이야? 황당하다 진짜. 나 사복 입으면 친구들이 다 예쁘다고 그러고

이든요?'

'자기 입으로 자기가 예쁘데. 오늘 아주 큰 웃음 주는구나. 원래 여자들끼리는 서로 예쁘다고 해주는

거 몰라? 너 애들이 하는 말 그냥 믿었냐?'

나도 생각해보면 뒤끝 있는 놈인가 봐. 전에 너한테 한번 당했다고 오늘 너무 복수하는 거 같다 나. 이제

그만할게. 근데 그거 알아? 너 놀리고 반응 지켜보는 거, 정말 재밌어. 나쁜 뜻으로 이러는 거 절대 아

닌 것 알지?

지하철에 앉자마자 손시연이 갑자기 가방에서 뭔가를 꺼낸다. 모의고사 시험지와 사인펜이다. 아니 이

걸 왜 여기서 꺼내? 설마 내가 예상하는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아저씨 때문에 빨리 나오느라고 채점도 못했잖아요. 자, 아저씨도 사인펜 하나 잡아요. 영어랑 사탐은

아저씨가 매겨요. 참고로 오늘 영어랑 사탐 풀 때 정말 느낌 좋았음.'

교복 입고 대학교 돌아다니면 쪽팔리는 건 아는 애가, 지하철에서 이러면 쪽팔리는 건 왜 모를까.

봐봐. 벌써 몇몇 사람들이 우리를 미소 지으면서 쳐다보고 있잖아. 지하철에서 시험 점수 매기는 여

고생과 그 옆에서 그걸 또 도와주고 있는 '아저씨'라고 불리는 삭아 보이는 남자의 조합을.

'아! 수학 또 70점 맞았어. 우.. 아저씨 영어랑 사탐 몇 점이에요? 그래도 제일 감 좋았는데.'

손시연, 대체 네가 말하는 '감이 좋다' 의 사전적 정의가 뭐냐? 앞으로 우리 만나는 시간 좀 줄여야 겠

다. 나는 채점한 시험지를 건네준다. 손시연은 곧바로 휴대폰을 눌러서 점수를 계산한다.

그래. 그래도 총점은 계산해 봐야지. 근데 조심해 손시연. 아까부터 주위 사람들, 안 그런척하면서 은

근히 너 몇 점 나올까 궁금해하고 있어. 네가 너무 소란스럽게 채점해서 그래. 그냥 너 혼자 조용히 계

산만해. 알았지? 동네방네 네 점수 다 소문 내지 말고.

'어... 421점이다...'

제발. 별로 높지도 않은 점수, 다른 사람들 다보는 앞에서 광고 좀 하지 마. 쪽팔리지도 않아? 김창수

가 언어영역 3번으로 다 찍고 잤어도 너보다 10점은 높게 나왔겠다. 다행히 실망하는 눈치기는 하네

그래. 그렇게 아쉬워하고 절치부심하는 게 중요한 거야. 그런 마음가짐으로 다음에 잘 보면 되지. 수고

했어. 아무튼

'완전 점수 낮다..... 에이, 뭐 어때 내신에도 안 들어가는 건데.'

휴... 그래. 매사 긍정적인 건 마음에 든다. 신촌 다 도착했다. 빨리 시험지 챙기고 일어나. 너랑 신촌 온

것도 꽤 오랜만인 거 같아.

우리는 신촌에서 저녁을 먹고 연세대로 갔다. 방학이지만 학교 안에는 학생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

다. 연인 사이로 보이는 사람들. 친구로 보이는 사람들. 뭐가 그렇게 바쁜지 뛰어가고 있는 사람들. 나

역시도 저 중에 한 명이겠지. 근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우리도 이렇게 같이 걸어가니까 연인 사이

같지 않냐? 가만, 누가 고백하거나 사귀기로 한건 아니니까 연인 사이라고는 할 수는 없는 건가. 우리

서로 좋아한다고 말해본 적도 없고. 손잡아 본 적도 없잖아.

'그래도 아저씨 때문에 연대도 구경하고. 고마워요. 근데 다리 아프다.... 아저씨 걸음 정말 빠른 거 알

죠? 늘 느끼는 거지만 따라가기 진짜 힘들어요. 어디 잠깐 앉으면 안 돼요?'

맞아. 나 걷는 속도 너무 빨라. 그래서 예전에 소영이도 맨날 천천히 좀 가라고 구박하고 그랬는데. 그

뒤로 여자랑 있을 때는 의식적으로 느리게 가려고 노력하는데, 그래도 너한테는 너무 빠른가 보네. 미안

해. 앞으로 너랑 있을 때는 좀 더 신경 써서 천천히 걸을게.

우리 너무 많이 걸었나 보다. 하기야 저번에 연세춘추에서 보니까 지하철역에서 우리 학교까지 1 km도

훨씬 넘는다고 하더라. 저기 대강당 앞 벤치에 앉자. 내가 음료수 뽑아 올게.

우리는 그렇게 대강당 앞에 있는 벤치에서 음료수를 먹으며 앉아 있었다. 그때 서로 많이 말을 나눈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편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너를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벤치에 앉아 있는데 대강당 앞을 지나가던 같은 반 여자애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온다.

'성민 오빠다. 오빠 여기서 뭐 해? 옆에 누구야?'

손시연 말하는 거야? 손시연이 손시연이지 누구겠니. 아, 너희들이 말하는 '누구냐'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지. 여자친구냐, 여동생이냐, 그냥 친구냐 뭐 이런 거 확인하고 싶은 거잖아. 잠깐만 막상 그러고 보

니까 애매하네. 대체 무슨 사이라고 해야 하는 거야. 우리? 아직 여자친구라고 말하기도 뭐 하고. 그렇

다고 그냥 친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빨리 생각해봐 최성민. 네가 대답 안 하고 있으니까 분위기 이상 해지

려고 하잖아.

'아.... 그냥 아는 동생이야. 너희들 어디 가?'

휴... 아는 동생이라고 해버렸어. 힐끔 손시연 쪽을 쳐다본다. 약간 실망한 얼굴이다 너? 미안. 그래도

쟤네들한테 내 여자친구요! 하기에는 우리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아. 안 그래?

'아저씨, 방금 저 언니들은 누구예요?'

'친구야. 같은 반 친구.'

'저 이제 다리 안 아파요.'

너 약간 퉁명스러워졌어. 삐졌니? 아주 조금 삐진 거 같기도 하네. 걔네들은 왜 하필 그때 거길 지나가

서 말이야. 나름 분위기 괜찮았었는데.

우리는 청송대로 갔다. 여름인데도 청송대는 시원하다. 공기도 좋다. 손시연도 기분이 많이 풀어진 눈

치다.

'와, 연대에 이런데도 있었네요? 나무 진짜 많다. 예뻐요.'

'여긴 청송대야. 너 청송대가 무슨 뜻인 줄 알아? 맞춰봐.'

'무슨 뜻인데요? 푸를 청, 소나무 송. 푸른 소나무... 이런 거 아니에요?'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래. 들을 청에 소나무 송이어서 청송대래. 눈 감고 있으면 바람이 지나가면서

나무에서 소리가 나거든. 그때 소원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데.'

잠깐 이건 아닌데. 사실 소원 얘기는 내가 지어낸 거야. 왠지 로맨틱해 보여서. 뭔가 있어 보이잖아?

'이름 진짜 예쁘다. 소원 빌면 정말 이뤄진데요? 한번 해봐야지.'

손시연이 멈춰 서더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소원을 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다. 생각보다 진지한

모습이다. 어떡하느냐 얘 진짜로 믿었나 보네. 이제 거짓말이라고 하지도 못하겠다. 내가 소원 이야기를

왜 꺼냈을까? 손에 연이 천천히 눈을 뜬다.

'무슨 소원 빌었어?'

'비밀이에요 비밀. 근데 아저씨랑 요즘에 진짜 많이 만나는 거 같아요. 친구들보다도 더 많이 만나는 거

같음.'

'나도. 너 나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하숙집 앞에서.'

'그럼요. 아저씨 완전히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잖아요. 그때 남의 물건이나 막 뺏어가고.'

나도 마찬가지거든? 어떤 교복 입은 애가 남의 하숙집 앞에서 담배나 피우려고 하는 걸 보고 얼마나 혀

를 끌끌 찼는데.

'그래도 생각보다 이상한 사람은 아닌 거 같아요 아저씨. 처음 이미지에 비해서는.'

역시 마찬가지야. '생각보다' 이상한 애가 아니었어 너.

청송대에서 둘이 걷고 있어서일까. 갑자기 분위기가 조금 묘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생각해보니 우리 손

도 한번 못 잡아본 사이네. 같이 손잡고 걷고 싶어. 괜찮지 그 정도는? 근데 뭐라고 해야 하지? 저기.. 손

좀 잡아봐도 될까? 그래야 되나? 아, 무슨 쌍팔년도 연애 드라마도 아니고. 여자 사귄 지 오래되니까 이

런 별것 아닌 일에도 감이 많이 떨어졌나 봐. 그냥 막무가내로 손잡아버리면 네 성격에 소리 지르고

변태니 어쩌니 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하지는 못하겠고.... 어떡하지?

반대편에서 청송대 벤치에 앉은 어떤 커플들이 키스를 하고 있다. 와 팔자 좋구나 저것들. 어 근데 얘

왜 이렇게 민망해해? 대학생인데 뭐 저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는 거라고.

'저 사람들 완전 변태 같다. 아저씨 다른 쪽으로 가요.'

역시. 저런 걸 변태라고 하는 걸 보니 내가 손잡아도 반응은 뻔하겠구나. 그래도 나는 손을 잡고 싶어.

더 이상 주저하거나 혼자서 지질하게 계산하고 싶지는 않아.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손시연의 손을 잡았다. 다행이다. 약간 놀란 거 같긴 해도 뿌리치거나 하지는 않

네. 내 손이 차가운 편이라서 걱정했는데.. 대신에 네 손이 따뜻해서 괜찮은 거 같아. 부드럽다. 너 생각

보다 손 예쁘구나?

잠깐만이라도 이렇게 손잡고 걷자. 뻘쭘할 줄 알고 망설였는데. 의외로 하나도 안 뻘쭘해. 내가 왜 그랬을

까? 이렇게나 좋은데. 이렇게나 행복한데.

우리는 그렇게 손을 잡고 지하철역까지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까? 평범

한 연인으로 바라볼까, 아니면 여고생 와 대학생 커플이라면서 신기해할까? 아무렴 상관없다. 다른 사

람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나는 지금 너랑 손잡고 이렇게 걸을 수 있는 시간이 정말 소중하다.

3번 출구에 도착하자 손시연이 슬그머니 잡았던 손을 놓았다.

'학교 진짜 예쁘네요. 저 공부 열심히 해야겠어요. 고마워요 아저씨. 저 이제 갈게요.'

'많이 늦었으니까, 오늘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

왠지 손시연과 좀 더 같이 있고 싶다. 우리는 성수에서 내려 손시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도 손을 잡고

걸었다. 이번에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자연스럽다.

그때 손시연이 뭔가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잡았던 손을 놓는다. 약간 당황한 눈치다. 얘가 왜 이러지?

저만치 앞에서 중학생으로 보이는 어떤 여자애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다.

말하지 않아도 알 거 같아. 네 동생이지? 진짜 신기해. 너랑 정말 비슷하게 생겼어. 너보다 좀 더 날카

롭게 생기긴 했지만.... 손시연 주니어야 완전히 더욱 염려스러운 건 성격까지 너랑 비슷한 거 같다. 어

째? 우리 쳐다보는 눈빛 좀 봐. 나 뭐 죄지은 거 있냐? 그래도.. 귀엽다.

'야! 너 왜 늦었는데 밖에 나와있어? 아저씨 저 들어갈게요. 고마워요. 바래다줘서.'

손시연은 동생 손을 잡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동생은 계속 뒤돌아보며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

다 본다.

'언니 왜 이렇게 늦었어? 누구야 저 오빠는?'

'좀 조용히 해. 쪽팔려, 너 때문에. 넌 몰라도 되거든?'

'아빠한테 다 말한다? 누군데 누군데?'

'집에 가서 말하자 집에서. 좀 조용히 해! 입 막아버린다.'

손시연이 꼼짝도 못하는 상대가 있구나. 놀랄 일이네.

나는 집으로 들어가는 내내 티격태격하는 자매를 바라보다가, 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차가웠던 내

손이, 아직까지 따뜻하다.

#12. 시간

여름방학이 시작됐다고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다. 여름방학을 기준으로 정확히 여름이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일이 굳이 방학에 맞춰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크게 변하는 건 없다. 그래도 시간

은 아주 조금씩 나와 내 주변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그 변화는 생각보다 컸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어서 빨리 자유로운 대학생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언제나 똑같이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큰 변화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재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기

학원 책상에 죽치고 앉아있는다고 변하는 게 뭘까. 정체된 상태에서 1년을 버리는 건 아닐까. 온갖 생각

이 다 들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이후에, 재수 이후에 나는 큰 변화를 겪었다. 나에게 시간은 그런 존재

였다. 모든 걸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변하게 만드는 

굳이 방학의 전과 후를 나누자면 방학 이후에 내 삶은 많이 달라졌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매일 생각하

고 행복해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나는 또 그렇게 변화해간다.

손시연도 여름방학을 했다. 그런데 오히려 학교 다닐 때 보다 더 바쁘다고 울상이다. 아빠가 등록해준

종합반 학원이 너무 늦게 끝난다나 학원 덕분에 기대했던 것보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줄

어 들었다. 그래도 공부하는 애한테 학원 안 가고 같이 놀자고 할 수도 없고 너도 이제 곧 고3이잖아.

중요한 시기 그러고 보니까 고3 때는 더 바빠지겠네...

열시에 끝난다고 했지? 좀 늦긴 하다 정말. 셔틀버스 같은 것도 없다고 했는데 왜 학원에서 늦게 끝내

주면서 집에 데려다주지도 않는 거냐고. 요즘 이상한 놈들이 하도 설쳐서 얼마나 위험한데.... 잠깐만..

나 지금 걱정하고 있는 거야? 그런가 보네. 솔직히 걱정돼. 손시연 네 집까지 가는 길, 생각보다 어두침

침하고 인적도 드물어 보였다고.

소개팅할 때만 해도. 걱정된다기보다는 예의, 매너라고 생각해서 집까지 데려다주고 한 거였는데. 지

금은 진짜로 걱정돼. 조금 귀찮긴 한데... 그래도 가봐야겠어. 지금 빨리 나가면 늦지는 않을 거 같네.

학원 앞에 도착해보니. 때맞춰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다. 이 시간에 정말 열심히들 공부하는

구나. 하기야 공부할 때 공부해야지. 나도 저 때는 열심히 공부했었다고. 근데 얘는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나는 손시연에 이게 전화를 건다.

'어디야?'

'어 아저씨다. 나 지금 학원 끝나고 집에 가고 있는 중인데요.'

'나 지금 너네 학원 앞이야. 어디라고? 아 파리바게뜨 앞? 그리로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벌써 나온 거야? 수업 끝나자마자 책 덮고 아주 쏜살같이 달려 나왔구나. 그날 배운 거 차분하게 한번 더

훑어보고 천천히 나오면 안 되는 거니? 응?

조금이라도 일찍 보고 싶다. 나는 파리바게뜨 앞까지 뛰어간다. 손시연이 기다리고 있다.

'오 아저씨, 이 시간에 웬일로 학원까지 왔어요?'

'응...? 이 근처에서 친구 만나고 지금 막 헤어졌거든. 너 학원 끝나는 시간이랑 얼추 비슷하길래. 그

김에 데려다주려고 왔지.'

'잘 왔어요. 나 지금 완전 배고프거든요? 빵 사주세요. 아저씬 안 배고파요?'

난 괜찮아. 너나 많이 먹어. 나는 파리바게뜨에서 손시연에게 빵이랑 우유를 사줬다. 배고팠나 보네. 너

처럼 빵 맛있게 먹는 애 처음 본다. 너 정말 살 안 찌는 체질 맞나 보다. 난 밤늦게 그렇게 먹으면 다음날

바로 얼굴이 붓던데. 빵을 오물거리면서 손시연이 말한다.

'아저씨 우리 영화 보고 들어 갈래요?'

'영화? 지금이 몇 신데. 너 집에서 걱정 안 해?'

'오늘 아빠 외국으로 출장 갔거든요. 그래서 집에 동생밖에 없어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젓는다.

'그냥 나중에 보자. 지금 보면 12시는 넘어야 끝날 텐데, 안 피곤해? 너 꼬꼬마여서 어린이용 영화밖에

못 보잖아. 그리고 너 늦게 들어가면 네 동생도 밤늦게 혼자 집에 있어야 될 텐데.'

'아저씨 우리 아빠랑 똑같은 말한다. 그리고 내 동생은 나 안 들어오면 더 좋아할걸요. 아빠도 없으니

까 혼자 TV 보고 놀 수 있잖아요. 알았어요. 그럼 주말에 보든지 해요.'

그때 손시연의 휴대폰이 울린다. 아버지로부터다. 학원이 밤늦게 끝나니까, 잘 들어가고 있는지 걱정

돼서 전화하신 모양이다.

'응응 알았어요. 서현이? 잘 있어요. 오늘 친구들 만나서 저녁 먹고 들어왔데요. 아빠도 잘 도착했죠?

와 진짜? 그거 갖고 싶었는데. 완전 땡큐 아빠, 잘 다녀와요.'

'아버지야?'

'네, 일주일 동안 네덜란드 있다가 오시거든요. 걱정돼서 전화하셨나 봐요.'

'근데 학원이 왜 이렇게 밤늦게 끝나? 오전 반처럼 좀 더 일찍 끝나는 반은 없는 거야?'

'며칠 뒤에 학교에서 보충수업하잖아요. 그래서 오후반 등록한 거예요.'

아, 그렇지. 고등학교 2학년이니까 방학 때도 보충수업하는구나. 그러고 보니 나도 방학 때 학교 다녔

었어.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닌데. 시간이 지나니까 나도 모르게 잊고 있었네.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

네.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게 되는.

'너 공부하는 애가 왜 치마를 입고 다녀? 게다가 밤늦게 돌아다녀야 되면서. 너 뉴스 안 봤어? 밤길여

성 노린 범죄, 이런 거 그냥 공부할 땐 편하게 바지 입고 다녀.'

잠깐, 나 지금 진짜 꽉 막힌 사람 같아 보였어. 여자애들한테 '왜 이렇게 계집애가 밤늦게 돌아다녀!'

이러는 사람들 보면 저 인간 정말 꽉 막혔네.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내가 지금 그 인간들이랑 똑같이

이러고 있네. 그래도 어떡하니. 정말 걱정되는걸.

'치마요? 오늘 나오다가 입을 거 없어서 그냥 입고 나온 건데요? 그렇게 짧은 것도 아닌데요 뭘.'

'그리고 너 머리 너무 긴 거 아니야? 스트레이트 했지? 공부할 때 머리 흘러내려서 안 불편해?'

이건 더 오버한 거 같다. 진짜 별게 다 신경 쓰인다. 네가 밤늦게 치마 입는 것도, 머리 예쁘게 하고

다니는 것도. 그냥 쿨하게 넘어가 주면 좀 좋을까.

'공부할 때는 묶고 하거든요? 아니, 왜 사람 머리가지고 시비에요?'

'대학 가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머리할 수 있잖아. 학교 다닐 때는 머리 같은 거에 신경 쓰지 말지? 너 신

경 쓰는 사람 아무도 없다니까?'

'아저씨 진짜 고리타분하다. 늙어서 그런가 봐. 어.. 근데 아저씨 지금 되게 덥나 보다. 땀 많이 흘려요.

등 쪽에 땀 때문에 막 젖었음.'

응 나 땀 많이 나는 편이야. 게다가 아까 늦을까 봐 막 뛰어왔다고. 근데 너 뭐 꺼내는 거야? 이젠 네가

가방에서 뭐 꺼낼 때마다 걱정되는 거 알아?

손시연이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더니 내 얼굴에 부채질을 해준다. 너한테 이런 센스도 있었구나. 시원

하다. 누가 나한테 이렇게 부채질해준 것도 오랜만인 거 같아. 정말

'시원하죠? 자요. 내가 30번 부쳐줬으니까 아저씨는 50번 부쳐줘요. 저 정확히 셀 거니까. 꼭 50번 해야

돼요. 제대로 안 하는 거는 안셀 거예요.'

역시. 웬일로 네가 먼저 순순히 부채질해준다 했지. 휴... 그리고 너 절대로 30번 안 부쳐 줬거든? 한

15번 정도 해준 거 같은데? 내가 알면서도 속아준다. 속아줘

'와 시원해. 아저씨 헬스한다면서요. 힘 뒀다 뭐 해요 이런 데라도 써야죠. 맞다! 헬스 시작한 기념으로

20번 더하기.'

네 마음대로 그런 편파적인 규칙 좀 정하지 마. 내가 너 부채질해주려고 돈 들여서 헬스한 줄 알아? 근

데 이거 은근히 팔 아프다. 그렇다고 쪼잔해 보이게 팔 아프다고 그만 둘 수도 없고 왠지 더 땀나는 거

같아.

'자 70번. 이제 네 차례야.'

'이제 그만. 나 시원하거든요~?'

안돼. 내가 얼마나 열심히 부채질해줬는데, 이대로 물러설 순 없어.

그때 손시연이 웃으면서 공책을 뺏어가더니 팔짱을 낀다. 어? 너 나 못 움직이게 하려고 이러는 거지.

완전 나를 가지고 노는구나. 그래도 기분 좋다. 처음 손잡았을 때랑 비슷한 거 같아. 부드러운 느낌

이제는 팔짱 끼고 걸어도 별로 안 어색하네. 근데 조금 부끄럽긴 하다. 이런 거 말하기는 좀 쪽팔리지만.

약간 떨려.

'있잖아. 나 궁금한 거 있는데, 하나 물어봐도 돼?'

'네. 한번 들어보고요. 뭔데요?'

'그때 너 왜 하숙집 앞에서 담배 피우려고 했었던 거야?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아... 그때요?'

손시연이 고개를 돌려서 내 눈을 쳐다본다. 처음이야. 이렇게 서로 가까이서 눈을 쳐다본 적도 없었던

거 같아. 눈 크다 너. 눈동자도 까맣고, 쌍꺼풀도 예쁘고, 대학 가면 수술 같은 거 하지 마. 내 주변에 보면

여자애들 대학 갔다고 성형수술하고 하더라. 내가 보기엔 수술 안 해도 충분히 예쁘던데.

근데... 너 분명히 미소 짓고 있는데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여 맞아. 눈빛이 그래. 너 옆에서 보면 가

끔씩 얼굴은 웃고 있는데 눈빛은 슬퍼 보일 때 있는 거 알아?

'그냥 여러 가지로 짜증 나고 슬퍼지고 해서요. 그날이 엄마 생일이어서 엄마 생각도 나고...'

아. 어머니 중학교 때 어머니 돌아가셨으면 정말 슬펐겠다. 안 그래도 사춘기에다가 민감할 땐데.. 항

상 긍정적이고 밝게만 보였어 너. 그래서 그런 아픔이 있었는지 몰랐어. 미안해.

'그것 때문에 그랬구나 내가 말했나? 나는 아버지가 안 계셔.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

'정말요? 그렇구나... 오늘 처음 알았어요. 아저씨 은근히 나랑 비슷한 점 많은 거 같아요. 외모랑.. 성격

이랑... 주변 환경이랑.... 이런 거만 빼면'

저기, 분위기 깨서 미안한데 '외모' 가 다르다는 걸 왜 그렇게 강조해서 말해? 나도 알아. 나 안 잘생긴

거.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강조 좀 하지 마. 자기 안 멋있는 거 스스로 잘 아는 사람한테 너 안 멋있다고

확인사살하는 거만큼 잔인한 짓도 없는 거란다.

근데 말이야, 외모에 성격에 주변 환경까지 다르면 아예 공통점이 없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닐까? 하기야

너랑 나랑 하도 다르기 때문에 아주 조금 있는 공통점이 더 돋보이는 걸지도 몰라. 그리고 나 이제 공

통점 같은 거 찾지 않기로 했어. 그런 거 없어도 네가 좋아. 나는.

'내 생각엔 그래. 난 힘들거나 외로울 때 아버지 생각하면 힘이 나거든. 왠지 하늘에서 나를 계속 지켜

봐주시는 거 같은 느낌도 들고... 너는 안 그래? 꼭 직접 보고 직접 이야기 나눌 순 없더라도, 그렇게 느

낄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다는 거 만으로도 마음이 편하잖아. 뭐 가끔씩 슬퍼지고 하는 거야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아저씨 말 들으니까 진짜 그런 거 같아요. 고마워요. 그런 말해줘서. 그런 말해주는 사람 내 주변에 한

명도 없었는데...'

아니야, 사실 너 때문에 나도 아버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어. 방금 너한테 한 말 머릿속

에서 맴돌기만 했던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너한테 말하면서 더 선명하게 정리된 거 같아.

'그건 그렇고. 너네 집으로 가는 길 원래 이래? 되게 으슥하고 어둡잖아.'

'지름길이라서 그래요. 큰길로 가도 되는데 그렇게 가면 한 10분 정도 더 늦어진단 말이에요.'

아 큰길로 갈 수도 있구나. 그럼 이리로 가지 마. 걱정돼. 넌 겁도 없어?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데.

'다음부터는 큰 길로 가. 10분이면 얼마나 된다고 이렇게 어두운 데로 가? 학원도 늦게 끝나면서.'

'아저씨 아까부터 계속 우리 아빠랑 똑같은 말한다. 근데 지금 나 걱정하는 거예요? 오~'

'걱정은 무슨, 넌 얼굴이 무기니까 괜찮아. 너 스스로 미사일 방어 체제를 구축하고 있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러는 거지.'

'와, 아저씨가 나 걱정해준다. 감동이다. 감동. 이게 웬일?'

제발 그렇게 콕 집어서 말하지 좀 마. 그냥 좀 모른 척 넘어가 주면 안 돼? 이 나이 돼서 부끄럽게 만들어

야겠어? 그래 걱정돼 엄청. 자꾸 걱정되는 걸 어쩌라고.

'하기야 착각도 자유니까 마음대로 생각해. 앞으로 너 학원 끝날 때 와도 돼? 아버지가 데리러 오거나

하지 않아?'

'아빠가 학원 버스 없으면 데리러 온다고는 했는데... 정 아저씨가 오고 싶으면 아빠한테 학원 버스 타고

온다고 하죠 뭐.'

이건 뭐 자기가 선심 써주는 것처럼 말하네. 아니, 선심은 선심인가? 아버지 차 타고 오면 더 일찍 올 수 

있는 거잖아.

어느새 손시연 집 근처에 도착했다. 너 그거 알아? 너랑 있으면 시간 정말 빨리 지나가는 거. 그래서 가

끔 아쉬운 느낌 드는 거.

'너 동생 또 나와있는 거 아니냐? 저번에 보니까 완전히 나를 경계하는 눈초리던데?'

'아.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요즘에 나 완전히 약점 잡혀있는 거 알아요? 정말 귀엽죠 걔 학교에서 인

기짱이에요.'

'응. 언니 안 닮아서 나중에 크면 예쁘겠더라. 걔라도 예뻐야지. 다행이야.'

'또 또 아저씨가 외모 지적하면 어이가 없어요, 진심으로.'

손시연이 팔짱을 풀더니 집으로 들어간다. 다행히 오늘은 동생이 나와있지 않다.

잘 들어가. 그런데 있잖아. 우리 계속 이렇게 팔짱 끼고 걸어갈 수 있을까? 아직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솔직히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해.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 많은 게 변했거든. 그게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되돌아보면 나도 변하고 내 주변도 변했어.

우리만 해도 그래. 당장 몇 년만 있으면 너는 고3이고, 대학교 가야 하잖아. 나도 언젠가는 군대를 가야

하고, 졸업해서 직장도 가져야 할 거고,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지는 않을 거야. 우리 주변

도 많이 변할 거고.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복잡해지고 싶지는 않아. 또다시 너와

나 사이에 바보같이 벽을 만들고 싶지도 않아.

넌 우리 사이에 있던 벽을 넘어서 나에게 다가와 줬어. 그러니까 다시 벽을 만들지 않을 거야. 나한테

필요한 건 벽을 만들어내는 우매함이 아니라, 앞으로 생기게 될 새로운 벽을 부술 술 있는 용기인지도

몰라.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거, 있을까? 앞으로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이렇게 너랑 함께

였으면 좋겠어. 시간 탓이나 핑계 같은 거 더 이상 대고 싶지 않아.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믿어.

#13. 회상. 2008년 9월 28일. 서울

춥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더위가 계속될 줄 알았는데 어느새 춥다. 유난히 길었던 더위를 시

샘하기라도 한 걸까. 물을 줘야 생기를 찾을 수 있었던 화단의 꽃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물을 주면 얼어

버린다. 얼어서 부서져버린다. 며칠 전만 해도 분명히 더웠는데. 그래서 반팔을 입어야 했었는데

#14. 대학로

연극을 보기로 했다. 사실 이전에 꼭 연극을 봐야겠다는 계획을 가졌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 전

학원을 마친 손시연을 데려다주면서 했던 이야기가 발단이 됐다. 그때 알게 된 사실인데 손시연은 지금

까지 연극을 본 적이 없었다.

'연극요? 뮤지컬은 아빠랑 동생이랑 몇 번 봤는데... 연극은 어릴 때 본 어린이 연극? 이런 거 말고는 본

적 없는데요?'

어린이 연극이라면 피터팬, 아기공룡 둘리 뭐 그런 거? 역시 꼬꼬마. 그랬구나 맨날 신촌이랑 학원 근처

에서 영화만 보고 밥만 먹을게 아니라, 연극도 보고 대학로도 놀러 가고 할 걸 그랬네.

운 좋게도 나는 반 친구로부터 연극 티켓 두 장을 아주 싼 가격에 얻을 수 있었다. 그 친구가 어느 잡지사

에 응모한 게 당첨돼 티켓을 받았는데 이미 본 연극이라 나에게 넘긴 거였다. 연극 이름은 오! 당신이 잠

든 사이. 나는 표를 얻자마자 이번 토요일에 연극을 보자고 손시연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그 극단의 홈

페이지에 들어가서 커플들에게 해주는 이벤트도 신청했다. 훗. 이 정도면 정말 괜찮은 남자친구 아닌

가. 근데 이벤트 신청한 사람들이 뭐 이렇게 많아? 당첨될 확률은 별로 없겠다.

나는 동대문 운동장에서 손시연을 만나 곧장 대학로로 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대학로는 신촌만큼이나

사람들로 붐빈다. 성균관대에 다니는 친구들 몇 명이 있는 터라 이 주변은 나에게 꽤나 익숙하다. 휴대

폰을 확인하니 연극이 시작되려면 한 시간 조금 안되게 남아있다.

'아저씨 나 배고프다. 점심 먹고 가요.'

너 밥 안 먹었어? 전에 내가 전화해서 그렇게 당부를 했건만. 시간 애매할지 모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점심 먹고 오라고. 네가 꼭 그렇게 하겠다며. 근데 지금 이렇게 천진한 얼굴로 배고프다고 밥 먹자고 하

면 어떻게 하니. 응? 난 너 만나러 오기 전에 이미 먹었다고.

'배고파?'

'그럼 점심시간도 넘었는데 당연히 배고프죠. 아저씬 배 안 고파요?'

응. 전혀 하숙집에서 밥 두 그릇에 계란 프라이까지 해 먹고 왔거든. 이거 완전히 적반하장이네

'아... 먹어야지! 시간 별로 없으니까. 어디 잠깐 앉아서 먹을 때 없나? 롯데리아 갈래?'

'햄버거 별론데. 밥 먹고 싶어요 밥.'

먹을 때만큼은 자기주장이 정말 확실해 너 이 잡식동물...이라고 하면 너 또 삐질 거야 그지? 그래 좋

은 게 좋은 거라고. 어린애 데리고 다니는데 밥은 잘 먹여야지. 이 근처에 밥을 먹을만한 데가 있으려나.

'시간 없다면서요. 아무 데나 들어가요. 여기 밥집인 거 같은데? 여기가요.'

멈춰봐. 거긴 기사 식장이잖아. 식당 앞에 택시들만 왕창 서있는 거 안 보여? 아무리 본능적으로 배고파

도 기사님들만 있는 식당에서 여고생이 '여기 김치찌개 하나요!' 하기에는 좀 부끄럽지 않니? 저기 횡

단보도 건너편에 버섯매운탕집 있네 저기로 가자.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 그런지 식당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시원한 자리를 찾아서 손시연을 데리고 앉

는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온다.

'나 이거 먹을래요. 아저씨도 같은 거?'

'응..? 난 안 먹을래. 너 혼자 시켜 먹어.'

'안 먹는다고요? 아저씨가 한 입만 달라고 해도 나 절대 안 줄 거거든요? 아. 돈 없구나? 내 건 내 돈으로

사 먹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시켜요.

아. 종업원 있는데서 제발 사람 한 명 불쌍한 인생으로 만들지 좀 마.

'아침을 늦게 먹어서 생각 없어서 그래. 안 뺏어 먹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냥 시키지 좀?'

'알았어요. 나 혼자만 시켜요 진짜? 저기요. 이거 하나 주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손시연이 시킨 메뉴가 나온다. 아까부터 우리를 흥미 있게 바라보던 여종업원이 음식

을 식탁에다 놔주면서 웃는 얼굴로 묻는다.

'여자친구분이신가 봐요? 여동생이신가?'

이런 질문. 근데 이제 별로 난감한 거 같지는 않아. 대답할 수 있을 거 같아.

'맞춰봐요. 무슨 사이 같아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손시연이 먼저 종업원에게 되묻는다.

'그러고 보니 남매라고 보기에는 외모가 좀 달라 보이는 거 같은데?'

와 그냥 말만 들어보면 전혀 나쁜 의미가 아닌데 왜 이렇게 기분이 찝찝하지? '외모가 달라 보인다' 고

하는 부분에서 대체 내 눈치는 왜 보는 거야? 그렇기 해도 저 종업원 우리를 연인 사이로 본 거네

'네 여자친구 맞아요.'

'대학생? 여자친구분 예쁘시네요. 여자친구분 동안이시다. 맛있게 드세요.'

'여자친구분 예쁘시네요, 여자친구분 동안이시다.... 라 저 사람이 그냥 두 분 다 잘 어울리시네요.

두 분 다 동안이시네요. 이렇게 말해주면 안 돼? 게다가 손시연은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인데 당연

히 동안처럼 보이지 원래 고등학교 저 나이 때 여자애들은 다 예뻐 보이는 거라고.

'봐요. 나 못생긴 얼굴 아니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 아저씨 분이거든요?'

이런, 예기치 않은 종업원의 립 서비스로 손시연이 또 기고만장해하고 있다.

'너 옷 살 때도 종업원들이 예쁘다고 잘 어울린다고 하면 그 말 그대로 믿고서 옷 사지? 저거 다 립 서비스

란다. 너처럼 속는 애들 또 오라고 하는 거야. 밥이나 먹지? 식겠다.'

손시연이 밥을 먹기 시작한다. 그래 늘 느끼는 거지만 이것저것 내숭떨면서 조금씩 먹는 여자보다는

잘 먹는 게 보기 좋다. 많이 먹어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맛있게 먹던 손시연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갑자기 찌개를 떠서 나한테 내

민다. 그래... 배부르니까 이제 내 생각이 조금 나니?

'자요. 아저씨도 먹어봐요. 정말 맛있어요.'

싫어 아까부터 버섯매운탕 떠서 쪽쪽 빨아먹던 숟가락이잖아. 저번에 아파서 며칠 안 씻고 다닌 거 때문

에 이미지가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나 은근히 깔끔한 성격이라고 나는 손시연의 숟가를을 못 본 척 하

며 옆에 있던 수저통에서 새 숟가락을 꺼내서 찌개를 한 입 떠먹는다.

'한 입만 먹을게 한 입만 아 맛있네.'

'아저씨 내가 먹던 숟가락이 더러워요? 왜 내가 준 건 안 먹어요?'

응 더러워 농담이고 아무래도 네가 먹던 숟가락으로 먹기에는 아직까진 좀 그러네.

'응 약간 그냥 먹는 김에 새 걸로 먹으면 되지. 왜? 네가 여기 설거지해?'

'나 양치질 하루에 3번도 넘게 하거든요? 와 무슨 남자가 저러냐.'

오. 모든 남자들이 두려워한다는 '쪼잔하다 공격' 너도 그런 거 할 줄 아네. 남자애들 보면 여자애들이

'무슨 남자가 쪼잔하게...'라고만 하면 별 수 없이 그 애 말을 들어주게 되더라고. 쪼잔하게 보이기 싫은

거지 근데 쪼잔하다는 말 들었을 때 반응하는 사람이 진짜 쪼잔한 사람인 거 알아? 나한테는 그런 공격

안 통하거든?

'야, 다음 주말에도 어디 놀러 가고 하자. 토요일이 괜찮지? 너 뭐하고 싶은 거 있어?'

너 이제 보충수업도 시작하고 바쁘잖아. 학원 데려다주는 것 빼고는 평일에 보기 힘들고 그러니까 주

말에 뭐 할지 정해보자.'

'그럼 우리 한 개씩 하고 싶은 거 말하기 해요. 대신 무조건 들어주기 알았죠? 아저씨부터 말해요.'

무조건 들어주기라. 진짜 무조건 들어주는 거지? 음 뭐가 좋을까.

'공포영화 보기 물리기 없음.'

'아. 싫어요~ 공포영화 절대 못 본다고 했잖아요. 다른 거 다른 거.'

너 지금 귀여운 척 앙탈 부리는 거야? 그럼 그렇지 무조건 들어주기는 무슨 그럼 또 뭐가 있지?

막상 생각해보려니까 떠오르는 게 별로 없네.

'그럼... 잠실로 야구 경기 보러 가기 어때?'

'야구요? 나 규칙 하나도 모르는데.... 박찬호 밖에 모르고... 박찬호 나와요?'

찬호 형은 지금 미국에 있다만... 쟤 분명히 야구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게 분명해. 야구도 안되겠다.

이럴 줄 알았어 이건 뭐 다 싫다고 하네.

'알았어. 그럼 그냥 같이 광화문 가서 근처 구경하고 밥 먹자 오케이?'

'에이. 그럼 재미없잖아요. 알았어요. 공포영화 볼게요. 대신에 나는 두 개 말할 수 있기.'

왜 너랑 뭐 내기하거나 하면 편파적인 규칙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만들어 내는 거야? 그래. 무려 공

포영화도 봐주신다는데 뭘 못들어주겠니. 말해봐라 말해봐.

'음... 나 옷 사고할 때 옆에서 짐 들어주기랑... 몇 달 후에 내 생일날 학교로 와서 선물 주고 가기!'

이건 뭐... 나를 무슨 퀵서비스센터 직원으로 만들어 버리네. 뭐하고 싶냐. 어디서 놀고 싶냐를 물어봤

더니만... 그래 네가 학생인데 쇼핑해봤자 얼마나 많이 사겠니. 그리고 네 생일 11월이니까 아직 멀었

구. 반드시 점심 먹고 오라고 당부한 것도 일주일 만에 잊어버리는 애가 그걸 기억할리 없지.

어느새 연극 시작할 시간이 다 됐다. 우리는 대학로에 있는 소극장으로 갔다.

그렇게 큰 규모의 극장은 아니었지만. 객석은 사람들로 꽉 찼다. 우리 자리는 중간쯤에 있었다. 손시연

도 매우 기대하는 눈빛이다.

객석이 어두워지더니 공연이 시작된다. 연극의 무대는 한 가톨릭 신부가 운영하는 허름한 병원이다. 손

시연을 닮은 성깔 있는 여고생 역할도 한 명 나온다. 공연 중간쯤일까. 어떤 한 남자배우가 무대 밖 객석

으로 나오더니 커플들을 지목해서 이벤트를 시작한다. 아 나도 저거 신청했는데.

'여기 손시연 씨 계십니까?'

와 당첨됐나 보다. 운이 좋네 야 손에 연 뭐 해? 네 이름 안 들려?

'야 손들어. 너 부르잖아.'

'어? 나 부르는 거예요? 내 이름 어떻게 알았지?'

어리둥절해하기는 진심으로 신기해하고 있어 후후. 내가 널 위해서 나름 신경 써서 이벤트 신청한 거

라구 기대해도 좋을 거야.

'손시연 씨? 옆에는 누구? 남자친구~? 흠'

음. 원래 이벤트가 저런 건가? 남자가 잘생기기는 했는데 목소리가 좀 느끼하군. 왜 이렇게 느끼한 눈빛

으로 손시연을 쳐다보는 거야?

'손시연. 당신 아버지 도둑이지? 난 다 알고 있어.'

관객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다 함께 '왜요?'라고 외친다.

'당신이 어렸을 때 하늘나라에서 납치한 다음. 날개를 숨겨버렸으니까. 하하하.'

헉. 저런 어이없는 개그 하는 게 이벤트였어? 게다가 저 배우.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좋아하고 있어.

나는 슬쩍 손시연 쪽을 쳐다본다. 그래도 천사라고 해주니까 좋아하긴 하는구나. 단순하기는 저건 이

벤트 당첨된 커플 여자들한테 다 해주는 소린데. 그래도 네가 좋아하니까 나도 기분은 좋아.

'옆에 남자친구 최성민 씨? 최성민 씨가 당신을 위해서 준비한 우유가 있어. 지금 줄까~?'

손시연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남자 배우가 느끼한 포즈로 손시연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귀에다 대고 

이렇게 소리친다.

'잘 들어봐. 아이~러브으 우유!'

윽. 제발 그만! 정말 민망해. 관객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즐거워한다. 아 씨 저 배우 입을 틀어막아버릴

수도 없고 손시연 넌 안 쪽팔려? 너 왜 이렇게 좋아해? 진짜 재밌어한다. 너

그 남자 배우는 공연 끝나고 열어보라면서 카드 한 장을 손시연에게 주고 다른 커플에게로 간다. 정작

신청한 나는 민망한데 다른 사람은 좋다고 웃네. 무슨 이벤트가 이래?

'와 우리 이름 어떻게 알았지? 신기하다. 저 사람 진짜 잘생겼죠?'

이거 어째 이벤트의 효과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거 같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좀 민망하긴 했어도 이

벤트 신청하길 잘한 거 같아. 어쨌든 네 기분이 더 좋아진 거 같으니까 연극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연

극이 끝나고 소극장을 나오면서 손시연은 남자배우가 준 카드를 꺼내본다.

[최성민♡손시연 두 분 예쁜 사랑하세요^^]

'아! 이거 아저씨가 부탁한 거구나? 맞죠? 오~정말 무뚝뚝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센스 있다. 아저씨

이건 기념으로 내가 가지고 갈게요.'

그걸 지금 알았니? 눈치도 빠르다. 우리는 소극장을 나와서 함께 대학로를 걸었다. 걸어 다니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때의 기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함께 걸을 수 있어서

좋다. 행복하다.

그때 손시연이 무언가 발견하고 내 팔을 잡아당긴다.

'아저씨. 우리 스티커 사진 찍어요.'

그러고 보니까 우리 같이 찍은 사진도 없네. 사실 나 여자친구랑 사진 찍고 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았

거든, 싸이월드에서 커플 미니미 맺고 커플 사진 올리고 하는 것도 별로였어. 우리 사이를 남한테 자랑

하는 거처럼 보였거든. 그냥 서로 얼굴 보면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지 그래서 소영이랑 같이 찍은 사진도 거의 없어. 소영이는 그런 부분을 늘 아쉬워

했었지만. 그래도 네가 이렇게 찍고 싶어 하니까 못 찍는다고는 못하겠다. 찍자 우리

사진을 다 찍고 나오려는데 손시연이 뒤에서 날 부른다.

'아저씨, 사진 골라야죠. 어디가요? 흠. 이건 내가 이상하게 나왔다... 이건 내가 눈 감았고...'

이거 완전 자기 잘 나오는 사진만 다 골라버리네. 내 사진도 좀 봐달라고.

'야. 나도 눈 감고 나온 거 있잖아 좀 내 거도 봐주지?'

'원래 이런 거는 여자가 잘 나온 거 고르는 거거든요? 사진 꾸미기도 해야 돼요 아저씨 먼저 해요.'

꾸미기도 해야 되는 거야? 하도 오랜만에 찍어보는 거라. 어떻게 해야 되지? 이걸 눌러서 별을 고르고..

다음은..

'아. 아저씨 진짜 느리다. 시간제한 있거든요? 그냥 내가 할게요.'

손시연이 다급하게 내 자리를 뺐더니 빠른 손놀림으로 화면을 콕콕 찍어서 스티커 사진을 꾸민다. 와

처음으로 네가 무지 든든해 보인다. 완전 전문가구나. 너? 스티커 사진 꾸미기 전문가. 손이 안 보여

손시연 덕분에 사진 꾸미기까지 무사히 마치고 기다리고 있자 사진이 나온다.

'와 잘 나왔다. 그러죠 거죠?'

아니. 순전히 너만 잘 나온 거겠지.

'아저씨 머리 진짜 크게 나왔다. 내 두 배다 두 배.'

윽. 그건 네가 뒤로 가고 내가 앞에서 찍은 사진이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아저씨 이거 휴대폰에다 붙여요. 난 아빠가 보면 안 되니까 지갑 안에다가 붙일게요. 알았죠?'

사실, 나 이런 거 부끄러워서 별로 싫어하는데 그냥 나도 지갑 같은데다가 붙여놓고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서 보고 싶다고. 나중에 너 몰래 다른데다 붙여놔야겠다.

'저녁 먹어야지? 뭐 먹을래?'

'오늘은 집에서 아빠랑 동생이랑 같이 저녁 먹기로 했어요. 아빠가 저녁해 준다고 들어오래요.'

하기야 주말 저녁인데 집에서 가족이랑 먹어야지. 아버지가 되게 가정적인 분이신가 보네. 직접 저녁도

해주시고 그런 아버지가 있어서 네 성격이 그렇게 밝은가 봐 나도 나중에 내 자식들한테 직접 음식도

해주고 할 수 있을까?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피곤했나? 지하철 안에서 손시연이 꾸벅꾸벅 존다. 지하철이 흔들리는데 맞춰

고개가 흔들린다. 나는 자세를 고쳐서 손시연이 내 어깨에 기댈 수 있게 해준다. 너 진짜 천진난만하게

잔다. 수업 때도 이렇게 조는 건 아니겠지?

어느새 성수역이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은데. 야 손시연 일어나 집에 가야지

헤어지기 전 손시연이 내 손에 깍지를 끼고 흔들면서 말한다.

'아저씨 오늘 고마웠어요. 연극도 엄청 재밌었어요. 또 봐요.'

응. 잘 가 나도 고마웠어. 손시연이 집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도 발걸음을 되돌린다. 그러고 보니 나도

집에서 저녁 해 먹어야겠네. 뭘 해 먹을까. 손시연 말대로 라면 끓여먹지 말고 밥 먹어야겠다.

그때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린다. 오, 손시연? 네가 헤어지고 나서 고맙다는 문자도 보내? 웬일이

냐. 그래도 기분 좋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posted by 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