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ire의 의대생 이야기 4

펌 썰 2017. 4. 11. 23:16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0922() 234607 KDT

제 목(Title): 사랑스러운 아내

 

 

'사랑하는 엘라 제인, 아내이자 생애의 벗, 여기에 잠들다. 50년의 행복을 진심으로 감사하노라...'

...

 

"50년이란 얼마나 긴 시간일까?"

 

"50? ... 글쎄, 휴일을 빼고 150학기라는 셈이 되는데... 너무 길어서 실감이 안 나는 걸?"

 

"넌 날 그처럼 오래 사랑할 수 있어?"

 

                         - Alan Parker, '작은 사랑의 멜로디'

 

 

"자궁경부암... 이놈은 약물 치료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죠.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도 않아요. 방 군이 얘기하겠나?"

 

김노경 교수님은 유학을 마치고 갓 귀국하신 방영주 교수님을 지목하셨다.

 

"그렇습니다. 자궁경부암은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 이외의 방법은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cisplatin이 나온 이후로는 얘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cisplatin은 백금 제제로서 독성이 좀 강한 것이 흠이지만 제가 갖고 있는 자료에 따르면..."

 

 

따분한 종양학(oncology) conference... staire는 필기에 여념이 없었다. 'cisplatin, SE! but pot. in UCC...'

 

시스플라틴, 부작용(Side Effect) 심하지만 자궁경부암(Uterine Cervix Cancer)에 효과가 있음... 이런 뜻이다.

 

 

교수님께서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가시는 '부작용'이란 게 어느 정도이길래 심하다고 하시는 걸까... 항암제 치고 약간의 부작용이 없는 경우는 없는데...

 

 

항암제란 기본적으로 세포를 죽이는... 그러니까 독성이 강할 수밖에 없는 약이다.

 

하지만 아무 세포나 덮어놓고 죽여서는 안되는 것이니까... 항암제는 주로 분열기의 세포를 공격한다. 암세포는 활발하게 분열하는 놈이니까 항암제에 가장 심하게 피해를 입는다.

 

 

그렇지만 우리 몸에서 암세포만 분열하는 건 아니다. 암세포이든 아니든 분열을 많이 하는 세포는 모두 피해를 입는다. 예를 들어 피부, 장점막, 머리카락, 골수, 생식 세포... 그래서 항암제 치료를 오래 받은 환자는 예외 없이 피부가 거칠어지고 머리가 빠지고 피를 토하는 등 부작용에 시달린다.

 

 

81 병동의 주치의(레지던트)들은 환자보다 한 발 앞서 도착한 차트를 대충 읽고 staire에게 휙 던진다.

 

"젠장... 우리 병동은 무슨 시체 처리장인가... 왜 죽을 때가 되면 보내는거야..."

 

 

차트는 정말  처참하다. 자궁경부암으로 수술을 받았으나 재발, 암세포가 간과 위장, , 그리고 최근에 뇌까지 침범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정도라면 치료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항암제(방영주 교수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신 cisplatin)와 방사선 치료를 5년째 받고 있는 중... 통원치료하다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 응급실을 거쳐 입원... 그리고 두툼하게 쌓인 각종 검사 자료...

 

'죽으러 왔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다.

 

 

잠시 후... 환자용 엘리베이터 쪽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스트레처에 실려 등장한 주인공(?) 성희순씨... 부스럼이 가득한 피부에 깨끗이 빠져버린 머리...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 전형적인 말기 암환자의 모습이다. 두 명의 간호사와 40대 중반 정도 되어보이는 보호자와 함께 81 병동으로 들어왔다.

 

 

성희순씨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한구석에 누워 있을 뿐.

 

 

staire나 다른 실습생들도 '배울 것 없는' 환자에게 접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아침 수업을 마치고 9시반쯤 병동에 올라갔더니 김노경 교수님과 방영주 교수님이 와 계시다. 주치의 성욱이형이 장갑을 벗으며 주사기에 든 것을 비닐 주머니에 옮겨 담고 있다. 아마 liver biopsy(조직 검사를 위해 굵은 바늘로 간조직을 떼어내는...)를 막 끝낸 듯하다. 환자는 고통스러운 듯 끙끙 앓고 있다.

 

늘 환자 곁을 떠나지 않는 보호자가 환자를 안고 쓰다듬어주며 위로하고 있었다.

 

"잘 참았어. 많이 아프지?"

 

말기 암환자의 고통이란 워낙 심해서 그까짓(?) biopsy가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니겠지만... 저 아저씨는 무척이나 다정다감하군...

 

 

그런데... 이건 좀 의외다. 환자는 거의 해골같은 모습을 한 할머니인데 40대의 젊은 남자가 잘 참았어... 라니? 저 사람은 환자와 어떤 관계일까?

 

 

차트를 다시 읽어보고 깨달은 사실은... 환자 성희순씨는 40대 초반의 젊은 환자.

 

항암 치료의 부작용으로 흉악한 몰골이지만 실제 나이로는 보호자와 부부간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병동이 조용해진 후 그분 곁에 가서 물어보았다.

 

"성희순씨 남편 되시죠?"

 

"그래요. 그렇게 안 보이시죠?"

 

그분은 빙긋이 웃으시며 부스럼과 허연 살비듬에 뒤덮인 환자의 머리와 이마에 뺨을 비비고 입을 맞추는 등 환자를 다독거리기에 바쁘다.

 

 

인턴이 정맥 주사를 하러 들어온 사이 그분과 staire는 병실을 나와 계단으로 갔다.

 

거기라면 눈치 안 보고 담배를 피울 수 있다.

 

 

"집사람이 너무 늙어 보여서 그러시는 거죠? 하긴... 그럴 만도 해요..."

 

"간호하시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어요."

 

"하하... 보기 좋았나? 집사람이 좀더 이쁘게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

 

 

staire의 가슴 속을 빙빙 돌고 있는 의문... 그분은 저런 몰골의 부인을 간호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아무리 정이 들 대로 든 사이라지만 정말 기쁘게 간호하고 있는 것일까?

 

 

"부인을 여전히 사랑하세요?"

 

그분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뿜는다.

 

"왜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 이래서야 질문을 한 staire가 무안해지고 말았다.

 

"지금 저런 모습을 하고 있어도 여전히 그런 감정을 갖고 계신 거에요?"

 

 

다시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는 그분의 옆모습... 괜한 질문을 한 건 아닐까...

 

그 짧은 시간 동안 staire는 그분의 대답을 이것저것 짐작해 보았다.

 

 

'오랜 세월 살다 보니 정이 들어서...'

 

'그동안 저때문에 고생했는데... 미안해서라도...'

 

'저마저도 외면하면 누가 돌봐주겠어요? 저 불쌍한 사람을...'

 

그러나 그분의 대답은 staire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맛있게 한 모금 빨아들인 뒤 연기를 뿜으며 staire를 돌아보는 그분의 눈빛은 마치 10대의 소년처럼 생기가 돌고 있었다. 약간 짓궂어 보일 정도로...

 

 

"강선생은 모를 거요... 저 사람이 처녀때 얼마나 이뻤는지..."

 

옛날을 회상하는 듯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그늘 없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0501() 024835 KST

제 목(Title): 전신 화상

 

* 이 글은 1995 4월의 대구 가스 폭발 사건을 즈음하여 씌어졌습니다. *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의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 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 전태일, 1970 8 9일자 일기에서

 

 

인권 변호사 조영래씨가 이름을 감추고 낸 '전태일 평전'이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도 전신 화상에 대한 남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대구에서 전해지는 몸서리쳐지는 소식들... 정치권과 언론의 치졸한 반응이야 넉넉히 예상했던 것이지만 그보다 더 깊이 내 가슴을 때리는 것은 '불에 탄 시체'라는 대목이다. 그 수많은 '중상자'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전신 화상 환자들...

 

 

일반외과 실습을 위해 파견 나갔던 어느 병원, 구로 공단에서 실려 온 전신 화상환자가 staire보다 한 발 먼저 도착해 있었다. 무표정하게 씌어진 일반외과 교과서의 화상 부분을 대충 읽고서 병실에 들어갔다.

 

얼굴과 가슴, 배 일부 이외의 거의 전신에 뜨거운 물(보일러에서 터져나온 100도가 넘는 가압수)을 뒤집어쓴 환자는 안타깝게도 의식을 잃지 않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단내가 나는 그의 입김을 쐬어가며 vital sign(호흡수, 맥박수, 혈압, 체온)을 재고 그의 너덜너덜한 피부를 이잡듯 뒤지며 바늘 꽂을 데를 찾았으나 도저히 찌를 곳이 보이지 않는다. 혈압대를 감을 곳이 없어 혈압 란은 비워 두고서...

 

 

결국은 금기로 되어 있는 경정맥(jugular vein)에 바늘을 꽂아야 했다. 화상 치료는 체액 균형을 맞추기 위한 수액 공급으로 시작되는 관계로...

 

 

전신 3도 화상의 참상은 어깨에 너덜거리는, 떼어내다 남은 작업복 조각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워카처럼 생긴 작업용 구두를 벗기다 묻어나온 살점 쯤은 관심 밖이다. 그보다 훨씬 더 처참한 과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거다...

 

화상 치료의 가장 힘들고도 고통스러운 부분은 환자를 '닦아주는' 것이다.

 

(경고 :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여기에서 q를 누르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농담이 아니에요.)

 

 

화상의 고약한 점은 그것이 아물어도 흉하게 일그러진 흉터가 남는다는 점에 있다.

 

손상을 입은 피부가 재생되는 과정에서 콜라젠 섬유가 제멋대로 꼬이며 흉측한 모습을 남기는 거다. 그거야 미관상의 문제 아니냐고? 소규모의 화상일 때는 물론 외관상의 문제로 끝난다. 그러나 전신 화상의 경우에는... 재생되어가는 콜라젠 섬유가 이리저리 꼬이고 수축하면서 관절을 죄는 것이다. 이대로 방치하면 완치된 후에도 관절을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혈관을 죄어붙여 자칫하면 팔다리를 잘라야 하는 사태에 이른다. (이따위로 인간을 만든 조물주의 심술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더우기 화상을 입어 흐물흐물해진 피하조직은 세균이 번식하기에 너무나 적합한 ''이다. 가뜩이나 화상에 따르는 스트레스로 면역 기능마저 정상이 아닌 환자에게 이것은 치명적이다.

 

 

그렇다면 그 해결책은...

 

 

하루에 한 번 또는 두 번, 화상 부위를 닦아주는 거다. 항생제와 링거 액에 적신 거즈를 손에 둘둘 말아서... 말이 좋아서 '닦아주는' 것이지 이건 '벗겨낸다'는 표현이 오히려 적합하다. 한 번 문지를 때마다 한 무더기씩 사람의 살인지 쓰레기통에서 흘러나온 썩은 고기인지 모를 지저분한 것이 거즈에 묻어난다.

 

 

지저분한 것쯤이야 참을 수 있다. 의사가 그런 것을 꺼린대서야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귀가 멍해지도록 목청껏 질러대는 비명... 이건 고문이다. 팔다리를 가죽끈에 묶인 채 침대에 고정된 환자의 고통에 감히 비할 바 아니지만 이런 환자를 닦아야 하는 고통 역시 인내의 한계를 넘나든다. 환자가 애처롭다고 해서 슬슬 닦아서 될 일도 아니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은 무자비하게, 눈 딱 감고 최대한 빨리, 그리고 말끔히 해치우는 것뿐이다.

 

 

어지간한 staire도 여기엔 두 손 들고 말았다. 손바닥 아래에서 환자의 갈비뼈가 부러져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CPR(Cardio Pulmonary Resuscitation : 심폐소생술)을 하던 staire였지만...

 

 

TV에서 흘러나오는, 격앙된 앵커의 음성으로 듣는 '중상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staire의 귓전을 울리는 8년 전의 그 비명소리, 선연히 떠오르는 그의 일그러진 얼굴과 비끄러맨 가죽끈이 끊어져라 당기며 온 몸을 뒤틀던 그의 몸짓 하나하나...

 

 

8년 전의 그때도 그랬다. 이런 살인적인 환경에 근로자를 방치하는 사업주와 정부에 대한 분노 이전에 한 개인이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이 staire의 단순한 머리속을 뒤덮었던 것처럼 오늘 뉴스를 보면서 어쩌면 수많은 시청자들에게는 그냥 무표정하게 들릴 수도 있는 '중상자'라는 말에서 그 숱한 화상 환자들이 보내고 있을 고통스러운 밤이 떠오르는 거다. 불 속에 내던져진 전태일 열사의 순결한 영혼과 어느 불행한 노동자의 비명, 그리고 오늘도 참아서 해결될 수 없는 고통으로 지샐 대구의 부상자들, 이 모든 것이 한데 얽혀 동물적이라 해도 좋을 분노가 되어 끓어 오르는 거다.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는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0803() 221419 KDT

제 목(Title): Sexual identity (절대로 야한 거 아님!!!)

 

 

(la fleur)이란 말이 여성명사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 가스똥 바슐라르

 

 

배율을 1500배로 올리자 시야는 흐릿해진다. 렌즈의 해상도가 감당하기 힘든 고배율 아래의 뽀얀 세계. 그 속에 쓰러져 죽은 커다란(그래봐야 10 마이크론 정도지만)

 

백혈구 한 마리.

 

"보이지?"

 

"..."

 

"뭐라고 생각하나?"

 

"글쎄요... neutrophilic myeloblast같은데요..."

 

김상인 교수님과 staire는 같은 슬라이드를 보고 있다. 슬라이드 하나에 접안 렌즈 여러 벌이 달린 교육용 현미경.

 

 

진단은 이미 알고 있다. 항암제로 한 번 실패한 AML(Acute Myelocytic Leukemia : 급성 골수성 백혈병).

 

"골수 이식 수술을 할 예정이지? 골수 제공자는 환자의 누나...맞나?"

 

"..."

 

"그렇다면 백혈구의 핵을 자세히 봐 두게...

 

"???"

 

1500배로 확대된 핵은 교과서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세 토막으로 갈라진 검은 핵. 이걸 잘 봐 두라는 이유는 뭘까...

 

"별로 특징이 없어 보이는데요?"

 

"당연하지. 가장 전형적인 녀석으로 일부러 골라서 보여주는 거니까."

 

"...?"

 

 

"16세의 남자 환자입니다. 1986 11월에 고열을 주소(chief complaint)로 해서 응급실을 거쳐 입원한 뒤 골수 검사 결과 AML로 밝혀져 항암제 치료 했으나 remission이 이루어지지 않아 골수 이식 수술 추천받은 상태입니다."

 

늘 그렇듯이 무표정한 김병국 교수님.

 

"골수 도너(제공자)는 누구지?"

 

레지던트 동운이형은 땀을 쓰윽 닦는다.

 

"환자의 누나입니다."

 

"수술 날짜는?"

 

"다음주 금요일입니다."

 

"자네도 들어가는 건가?"

 

"... 저는 도너 쪽에..."

 

 

내과 레지던트가 수술장에는 왜 들어가는가 싶겠지만 골수 이식 수술은 외과 수술이아니다. 마취과와 내과 의사들이 하는 수술인 거다. 수술실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한쪽에는 환자가, 다른 쪽에는 골수 제공자가 누워 있는 거다. 정확히 말하면 골수 제공자는 엎드려 있다. 제공자의 골반뼈에 굵기 3 -  5 밀리 정도 되는 무식한 바늘(바늘이라기엔 좀 굵은... needle이 아니라 trocha라고 부른다)을 꽂아 골수를 뽑아내는 거다. 전신 마취를 하지만 그래도 뼈를 깨어내는 고통을 받는 것은 제공자 쪽이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양쪽 엉덩이에 각각 40번씩 80번을 찌를 예정이라니 수술이 끝나고 골수 제공자가 바로 눕기까지 몇 주 이상 걸리는 게 보통이다.

 

그러는 동안에 환자는? 환자는 아주 팔자가 편하다. 제공자가 그 고생을 하는 동안 편안히 누워 있으면 된다. 마취 따위는 하지 않는다. 채취한 골수를 정맥 주사를 통해 수혈받는 것이 전부인 거다.. 도대체 누가 환자인지 모를 일이다.

 

 

수술 이틀 전, 환자의 몸에 남아 있는 모든 면역 시스템을 죽이는 작업이 시작된다.

 

'whole body irradation'... 평소에 방사선 치료를 할 때보다 훨씬 많은 양을 쬐어 모든 골수세포를 깨끗이 죽이는 거다. 이제 환자의 몸은 무방비 상태다. 여기에 골수 제공자의 골수세포를 수혈받으면 그것은 혈관을 타고 온 몸을 돌다가 결국 환자의 뼈 속에 정착한다. 이제 새로운 골수가 자라는 거다. 며칠 이내에 환자의 백혈구 수는 정상으로 돌아간다.

 

 

수술장. 갓 스물인 환자의 누나는 엉덩이를 드러내고 엎드려 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좋아할  군번은 이미 지났다. 그리고 그 예쁜 엉덩이에 가해질 무지막지한 폭력의 장면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 일이다.

 

"시작하시죠..."

 

 

한쪽씩 교대로 엉덩이를 찌른다. 그 굵은 trocha가 휘어질 정도로 체중을 실어올라타다시피 누른다. 뼈가 깨어지는 소리. 바늘을 뽑고 주사기에 연결된 튜브를 꽂아 빨아낸다. 골수라는 게 걸쭉하다 뿐이지 겉보기엔 피와 구별이 안 간다.

 

유리병에 어느 정도 모이면 옆방으로 보낸다. 거기서 골수의 이식(?)이 이루어지는 거다.

 

 

그 조그만 엉덩이의 어디에 80번이나 굵은 트로카를 찌를 곳이 있었을까. staire가 보았던 어느 수술보다도 처참하고 피를 많이 흘린 수술이 끝날 때쯤 모두들 땀에 흠뻑 젖었다...

 

 

"... 그래서... 수술 경과가 좋은 모양이지?"

 

"... CBC(Colligative Blood Cell Count) 결과도 정상에 가깝고 환자의 상태도 거의 만점입니다."

 

"이게 그 환자의 혈액 샘플일세. 어제 날짜로군... 한 번 볼 텐가?"

 

김상인 교수님께서 건네 주신 슬라이드를 현미경에 걸고 두 사람은 교육용 현미경에 마주 앉았다.

 

 

우선 저배율(100)로 백혈구를 찾아내고서...

 

"임파구(lymphocyte)는 안 돼. 중성구(neutrophil)를 찾아보게."

 

,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다. 제일 흔한 게 중성구니까.

 

"찾았습니다."

 

"오케이... 그대로 확대시키게... 1500배까지..."

 

찾아낸 백혈구를 가운데 놓고 400, 1000배를 거쳐 1500배까지... 시야는 다시 흐릿해진다. 볼 때마다 신비로움을 느끼게 되는 아찔할 정도의 고배율.

 

 

"핵을 자세히 보게. 이제 알겠지?"

 

그렇다... 이제야 무엇이 문제인지 석연히 보인다... 환자의 백혈구에는 여성에게만 있는, 두 개의 X 염색체 중에서 활성화되지 않은 쪽이 뭉쳐 있다고 하는 그 유명한 작은 덩어리가 붙어 있는 거다.

 

"... 알았어요... Barr body가 보입니다. 이건 여자의 백혈구에요..."

 

 

몸 속에 여성의 피가 흐르는 남성... 이걸 현대 의학의 기념비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괴물을 만들고 만 것일까...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0904() 052744 KDT

제 목(Title): 베토벤 8 - 마지막 페이지는 어디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는 것은

 

전원교향곡을 듣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다.

 

                               - 클로드 드뷔시

 

 

1989년이었을거다. 의대 오케스트라 OB MPO(Medical Philharmonic Orchestra)의 창단 연주회.

 

 

의사들이 대부분인 단원들은 연습 시간에 맞춰 출석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출석률이래야 겨우 절반을 넘을까 말까... 이러니 연습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연주회날까지 악보가 깨끗한 사람이 태반이었으니 (제대로 연습을 했다면 악보는 지휘자의 갖가지 지시 사항으로 지저분해야 한다.) 연주회가 시작되면 어떤 소리가 날지 아무도 장담 못하는 위기 상황. 이런 속에서도 고참 선배님들께선 '우리는 전통적으로 실전에 강해...'라며 마지막 리허설 직전까지 분장실에서 마이티만 치고 계셨다.

 

 

리허설이 끝나고 잠시 숨을 돌리는데 정형외과 의사인 어느 선배님께서 부르시는 거다.

 

"민형이 넌 악보에 잘 적어 놨지?"

 

"..." (약간 불안)

 

"난 이렇게 깨끗하거든... 그러니까 나하고 악보 바꾸자. 넌 다 외었지?"

 

으으... 후배가 무슨 힘이 있겠나. 선배님의 깨끗하다 못해 손을 베일 정도로 날이선 빳빳한 새 악보를 받아들었다.

 

 

연주회는 그럭저럭 넘어갔다. 정말 실전에 강한 사람들인지 어려운 곳은 적당히 뭉개면서 잘도 넘어간다. staire도 제 1 바이올린 말석에 앉아 기억을 더듬어가며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곡. 베토벤의 교향곡 8 4악장만 남았다.

 

4악장은 무지무지 빠르고 복잡하다. 수시로 반복되는 3연음과 8분음표... 잠시 한눈 팔다간 놓치고 만다. 한 번 놓치면 다시 템포를 잡아 끼어들 틈이 별로 없는 것도 문제다. 이래저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거다.

 

 

드디어 4악장도 거의 끝나고 이제 마지막 한 페이지만 남았다. 3마디 쉬는 사이에 잽싸게 악보를 휙 넘기고서... !!! 이게 웬 일... 마지막 한 페이지가 감쪽같이 떨어져 나간 거다. 악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남은 건 허연 백지 뿐. 아무리 연습 안 하는 선배라지만 이런 정도일 줄이야...

 

 

딴 생각 하고 있을 틈이 없다. 4악장 마지막 부분은 한껏 화려하게 부풀며 피날레를 향해 숨가쁘게 달려간다. 악보가 없다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는 웃음거리밖에 안된다. 어쩔 수 없이 앞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고 기억을 더듬어가며 쫓아갈 밖에.

 

 

격렬한 화음으로 4악장이 끝났다.

 

'... 정말 진땀 뺐네... 어쨌든 끝나서 다행이야...'

 

간신히 숨을 돌린 staire  지휘자가 시키는 대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몇 차례 쑥스러운 박수를 받았고...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재난이 하나 더 기다리고 있었다. 눈치도 없는 청중들의 앵콜 요청에 못 이긴 지휘자가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거다.

 

"앵콜 하지요 뭐... 4악장 후반부... 자아, 준비..."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0912() 045027 KDT

제 목(Title): 우선... 좀 오래 된 이야기부터...

 

 

지난 6월에 이미 이대 보드에 올린 글이지만

 

다음 글을 위한 배경삼아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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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울로스에 갔었다.

 

자정이 지나고 1시가 넘도록 마시고 또 마시면서

 

13년을 끌어 온 용준이의 사랑을 이야기했다.

 

 

녀석이 정민이를 '찍은' 것은 의예과 1학년 때.

 

늘 정민이 주위를 뱅뱅 돌며 말없는 호소를 정민이에게 실어 보내기를 6...

 

그러나 정민이는 그런 용준이의 마음을 알면서도

 

졸업과 동시에 성규와 결혼했고

 

그날도 우리는 아울로스를 찾아 용준이의 씻겨내린 6년을 위해 잔을 부딪쳤다.

 

 

정민이는 아이를 둘이나 키우는 주부 의사가 되었고

 

성규는 레지던트를 마쳤다.

 

 

지난 겨울, 왜 아직 결혼 안 하냐는 내 물음에

 

'그러는 넌 했냐.' 라며 산낙지를 씹던 용준이의 눈빛은

 

정민이를 향하던 그 6년간의 뜨거움이 하나도 식지 않았음을 보여주었고...

 

 

엊그젠가 한밤에 요란하게 울린 전화,

 

성규가 머리를 심하게 다쳐 입원했다는...

 

내가 그를 찾았을 때 이미 성규는 뇌사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좌측 전두엽과 측두엽을 거의 다 들어내는 뇌수술을 받아

 

회복되더라도 언어장애가 올 것임에 틀림없고

 

어쩌면 식물인간이 되어야 하는 그는 더 이상 내과의사가 아니었다.

 

 

결혼 후 7, 이미 친구의 아내가 된 정민이는

 

넋이 나간 모습으로 병실을 지켰고

 

친구들이 모두 성규와 정민이를 걱정하고 있는 그 웅성거림 속에서

 

나는 용준이의 타는 듯하던 눈빛을 떠올리고

 

남몰래 죄스러움에 몸서리쳤다.

 

 

용준이는... 돌아올 것인가

 

다시 정민이에게 손을 내밀 것인가.

 

어째서 나는 지금 성규보다도

 

13년을 골돌아 흘러 온 용준이의 사랑을 먼저 생각하는 것인가.

 

 

아울로스의 어두운 구석에서

 

우리는 떠들썩하게 잔을 들었다.

 

내 눈에 괴어 넘칠 듯한 눈물은

 

성규를 위한 것도, 용준이를 위한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도 내놓고 말하지 못할 사랑에만 예민한

 

유치한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그 부끄러움이 울고 있었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0912() 053021 KDT

  제 목(Title): 다음... 그 뒤의 이야기...

 

 

 

"민형이니? 나 용준이다."

 

"웬일이냐? 이 시간에..."

 

"... 약혼한다... 일요일에. 놀러 와..."

 

"......"

 

 

수화기를 내려놓고서 웃었다.

 

녀석은 서두른 걸까.

 

정민이에 대한 미련의 싹이 다시 자라는 것이 두려웠을 게다.

 

한동안 결혼 안 할 것같던 녀석이 선 본 지 2주만에 약혼을 선언하다니...

 

 

장마비가 퍼붓던 어느 주말, staire는 함을 지게 되었다.

 

좋은 날 언성 높이고 얼굴 붉히는 건 피차 원하지 않는 일이라

 

함은 쉽게 쉽게 들어갔고

 

우리는 아울로스 대신 그 아가씨의 집에서 다시 잔을 들었다.

 

 

11... 다들 추스리고 일어나는 시간에 용준이가 어깨를 짚는다.

 

"넌 조금 기다려라..."

 

"?"

 

 

꼬냑을 두 잔 이상 마시면 즐길 줄 모르는 거라던가?

 

그러나 우리는 2시간동안 둘이서 두 병을 비웠다. 두 시간, 둘이서, 두 병...

 

 

"무슨 얘길 하고 싶어? 신부 댁에 실례일텐데..."

 

"괜찮아. 지금 친구들이랑 함 열어보고 있으니까 한참 걸릴 거야.

 

여자들은 보석이나 옷 보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지?"

 

"......"

 

"민형이 너... 앙드레 말로의 인간 조건... 기억하냐? 거기 배경이 어디더라?"

 

"상해... 서구화의 물결을 제대로 타지 못하고 뒤뚱거리던..."

 

"오늘 저녁 이 집은 어때?"

 

짜식... 알 것도 같다.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한 중국 영화는

 

한결같이 화려하지만 어딘가 텅 비어 있는 상해를 배경으로 삼아

 

떠도는 인간들을 그리고 있지.

 

함에 든 것은 한복과 비녀, 반지, 노리개...

 

그렇지만 둘이 마주 앉아 마시는 테이블에는 꼬냑과 훈제 연어. 치즈와 아몬드.

 

''자가 새겨진 은수저와 미끈한 곡선의 포크...

 

양복에 금시계를 찬 용준이와

 

가짜 달비에 댕기를 드리고 한복을 입은 그 아가씨...

 

 

"그래서... 넌 동서양 문화가 억지스럽게 짜맞춰진 결혼 풍속이 불만이냐?"

 

"아니... 처음엔 뭐가 불만인지 몰랐어. 그냥 싫었지..."

 

"......"

 

"이제는 알겠어... 이건... 졸부들의 돈지랄이야..."

 

저 녀석... 자기 장인어른을 향해 졸부라니...

 

"내가 왜 이런 비싼 양복에 금시계를 차야 하지?

 

내 능력으로는 어림없는 패물을 뭣때문에 선물하는 거지?

 

이건... 단지..."

 

 

그래... 무슨 말인지 안다.

 

의예과 시절, 아침마다 서로 다짐하던

 

'후진국 학생은 5시간 이상 잠을 자면 안 된다...'

 

'후진국 학생은 하루에 8시간 이상 공부해야 한다...'

 

'후진국 학생은 맥주를 마셔서는 안된다...'

 

치기만만하지만 맑았던 우리의 눈은 어느새 꼬냑 위에 흐릿하게 비치는구나...

 

 

"용준아..."

 

"......?"

 

"하지만 네 결혼이야..."

 

"알아... 너는 정민이 때문에 더 걱정스러운 거지?"

 

"......"

 

"걱정하지 마... 내 결혼을 소중하게 지킬 거야."

 

 

그래... 깨끗이 씻겨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

 

같이 씻어내볼까?

 

......

 

 

둘이는 밤새 퍼붓는 빗속을 같이 걸었다.

 

용준이의 새 양복과 staire의 윗주머니에 든 디스켓이 후줄근해지도록...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0922() 150045 KDT

제 목(Title): 13째 딸의 이야기

 

 

양심적인 의사는 환자와 함께 죽어야 한다.

만일 함께 치유될 수 없다면...

 

           - 이오네스코, '대머리 여가수'

 

 

벌써 2년이나 묵은 사진. 의예과  1학년 때 친구들이랑 롤러 스케이트장에 가서 찍은 조그만 사진 속에서 13째딸 유정이는 약간 놀란 듯한 표정으로 렌즈를 향하고 있었다.

 

 

- 아빠, 오랜만이에요. 요즘 바쁘신가봐요?

 

- 저도 밤늦게 술마실 수 있는  건 오늘까지에요. 다음 주부터는 시험 준비해야 하거든요. 아시죠? 본과 1학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 신경해부학이 너무 재미있어요. 저는 나중에 신경외과 할 거거든요.

 

'신경외과? 외과 중에서도 가장 격한 곳이 흉부외과랑 신경외과라는 건 알고 있지?'

 

- 그럼요...

 

'유정아... 내가 남녀 차별하는 건 아니지만 여자 외과의는 쉽지 않아. 서울대병원에서는 외과 레지던트로 여자는 받지 않는걸.'

 

- 가끔은 받지요. 아주 가아끔...

 

- 알아요. 체력과 끈기... 하지만 제가 그렇게 허약해 보여요?

 

'......'

 

'본과 1학년은 아직 그런 거 생각하지 않아도 돼. 배우다보면 더 재미있는 건 얼마든지 있거든. 인턴 마치고서 생각이 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아...'

 

- 그래도 저는 신경외과 할래요. 고등학교때부터 생각했어요.

 

- 아는 분의 아들이 뇌수종(hydrocephalus)이었어요. 병원에서도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했고 결국 반 년을 넘기지 못했지요. 귀여웠는데...

 

'그런 애는 살아도 정상인이 될 수는 없는 게 보통이야...'

 

- 의사에게는 우선 생명을 살리는 것이 먼저 아닌가요? 장애인으로라도...

 

'그래... 거기에서 너하고 나는 크게 다르지... 나는 안락사를 시킨 적도 있는걸.'

 

- , 잘 해낼 거에요. 아빠한테 이 얘길 하는 건 나중에 제가 움츠러들 때마다 저를 혼내 주셨으면 해서에요. 맘 편히 유학 다녀오세요. 그때까진 신경외과 의사가

 

되어 있을 거에요. , 약속...

 

'......'

 

웃으며 유정이를 보냈지만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그애도 알고 있겠지. 자신이 헤쳐 나가야 하는 길이 얼마나 험하고 외진 곳인지.

 

 

사진 속의 열 세째를 모처럼 눈여겨 본다.

 

전에는 몰랐던 희미한 미소가 유정이의 입가에 감돌고 있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0925() 215637 KDT

제 목(Title): 간호원 이야기 - 약혼자의 의사 complex

 

 

나는 순간적으로 진실을 폭로하는 실언이라든지, 시선의 엇갈림을 훔쳐본다든지,또는 번개같은 직감 따위를 믿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항상 나를 놀라게 하는 말이있다. "그래서 당장에 그녀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고 하는 류의 말이 그렇다.

 

                                                 - 사강, '어떤 미소'

 

 

(제목을 보고 뭐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정식 명칭은 '간호원'이 아니라 간호사라고. 하지만 이 일이 일어났던 87년엔 아직 그들은 간호원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이조시대의 이야기를 하면서 병조 판서를 국방부 장관이라고 부를 수는없지 않은가...)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도서관을 나서던 staire는 도서관을 끼고 도는 어두운숲길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나직한 목소리를 주고받는 두 남녀.

 

'데이트족인가? 가만... 저 아가씬 우리 병동의 윤영미(가명) 간호원이잖아.'

 

"그래서? 내가 밤에 잘 못 나오는 거 자기도 잘 알잖아.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거 들키면 난 모가지라는 거..."

 

하긴 그렇다. 오후 근무하는 간호원이 밤 10시에 여기에서 데이트라니...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87년 당시 서울대 병원의 간호원은 3교대 근무...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하는 아침조, 오후 4시부터 자정까지인 오후조, 자정부터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 8시까지 일하는 야간조가 있어 24시간 빈틈없이 돌아간다.

 

일주일이나 2주일이 지나면 조를 바꾸어 또 쳇바퀴 돌듯이 일하는 거다. 그러다보니 간호원들은 소화불량이나 불면증은 기본이고 예민한 사람의 경우엔 생리불순으로 고생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사랑 싸움인가? 우리가 실습할 때 한눈 팔기라도 하면 막 야단치는 저 깐깐한 사람이 근무시간에 데이트라니... 하하...'

 

"잘났군... 그 잘난 직장 당장 때려쳐! 이건 이름만 약혼자지 얼굴 한 번 볼 수가 없으니..."

 

"자기, 질투하는 거야, 지금? 웃긴다, 정말..."

 

"그래, 질투다. 너는 웃기지? 난 미치겠다구... 밤이면 밤마다 그 잘난 의사놈들이랑 시시덕거리는 거 알면서 질투 안 하는 사람이 어딨어..."

 

"이건 일이야. 간호원이면 누구나 하는 거라구. 내 일, 그렇게 우스운 이유로 포기할 수 없어."

 

"뭐가 우스운 이유야. 너같으면  내가 한 달에 열흘씩 여직원들이랑 야근한다면 질투 안 하겠냐? 그것도 그 잘나가는 의사놈들이랑..."

 

"의사 의사 그러지마. 나 의사에 눈먼 여자 아냐. 그랬으면 의사랑 결혼했지..."

 

"그래? 눈 안 멀었지그럼 당장 관둬! 이렇게 불안하게는 못 살아내가 아무리 별볼일 없지만 의사처럼  떼돈은 못 벌어도 너 밤일 안  시킬 자신은 있어. 당장 때려치란 말야!"

 

 

숲 그늘에 가만히 앉아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staire는 살며시 가방을 집어 들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간호원들만의 아픔이 이런 예상 못한 곳에 또 하나 도사리고 있었다니...

...

 

그 다음 주엔가 윤영미 간호원은 성대한 환송식을 받으며 병원을 떠났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0930() 051245 KDT

제 목(Title): 가끔 하는 거짓말 2

 

 

* 시위를 마치고 같은 전철을 탔던 어느 젊은 학생의 상기된 얼굴,

그의 형형한 눈빛이 바래어 가는 오랜 기억 하나를 떠올리게 해 주었습니다. *

 

 

90년대 초의 어느날이었습니다.

 

'민자당 해체의 날'이라는 이름의 시위가 있기 전날.

 

의대 오케스트라 후배인 정현이('의대생의 사랑'의 주인공 정현이입니다.)와 함께 대학로에서 소주를 마시며 밤을 지샜습니다. 다음날 아침, 제가 자취하던 집에 데리고 가서 아침을 먹고 이제 정현이는 자신의 집으로, 저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갈 참이었습니다.

 

 

"형은 오늘 가투 나오실 거에요?"

 

"물론이지... 잘하면 종로에서 보겠구나."

 

정현이의 얼굴에 뭔가 흘낏 스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말없이 서로의 시선을 피하며 그냥 그러고 서 있었지요.

 

 

약간 상기된 정현이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 오늘 거리에서..."

 

"...?"

 

"... 다치지 말아요... 알았죠?"

 

 

staire는 책장에 줄을 지어 서 있는 손가락만한 12지신상을 잠시 바라보았습니다.

 

중국에 갔다 온 누군가가 선물한 12마리의 동물은 이제 8마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staire는 한 마리를 집어들었습니다. 닭이었을 겁니다.

 

"정현아... 이건 행운의 부적이야. 선물받은 건데..."

 

정현이는 돌로 만든 조그만 닭을 받아들었습니다.

 

"평생 간직할 생각 하지 말고... 나중에 네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해. 하지만 오늘은 누구에게도 주지 말고 꼭 갖고 있어야 해. 알았어?"

 

 

이제 7마리가 남았습니다. 다섯 번째의 거짓말이었죠.

 

 

사당역에서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staire는 신림동, 정현이는 잠원동을 향해 플랫폼에 마주보고 서 있었지요.

 

정현이가 타고 갈 차가 먼저 오려는지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순간,

 

", 이거 받아요!"

 

정현이는 맞은 편의 staire를 향해 무언가를 던졌습니다. 두 손으로 간신히 받아 든 그것은... 조금 전에 정현이에게 주었던 닭이었습니다. 어리둥절한 staire를 향해 정현이는 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두 손을 입가에 모은 채...

 

",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오늘 정말 다치시면 안돼요!!!"

 

전차의 굉음에 그의 목소리가 지워져 가고 있었지만 정현이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로 전차가 미끄러져 들어왔습니다...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1205() 233232 KST

  제 목(Title): 뒤늦게 쓰는 영화 전태일 감상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까 있을까

 

분홍빛 고운 꿈나라

 

행복만 가득한 나라

 

하늘빛 자동차 타고

 

나는 화사한 옷 입고

 

잘생긴 머슴애가

 

손짓하는 꿈의 나라

 

 

이 세상 아무데도 없어요 정말 없어요

 

살며시 두 눈 떠봐요

 

밤하늘 바라보아요

 

어두운 넓은 세상

 

반짝이는 작은 별

 

이 밤을 지키는 우리

 

힘겨운 공장의 밤

 

 

고운 꿈 깨어나면 아쉬운 마음뿐

 

하지만 이젠 깨어요

 

온 세상이 파도와 같이

 

큰 물결 몰아쳐온다

 

너무도 가련한 우리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 김민기, 이 세상 어딘가에

 

 

금년에 본 첫번째 영화, 그리고 아마도 금년에 보는 마지막 영화가 될 것같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잡념으로 가득한 staire는 영화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손을 씻을 데가 없어요라며 울던, 손으로 각혈을 받아내던 여공의 해쓱한 얼굴이 10년도 더 지난 어느 여름날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시대 1985. staire는 신도림동에서 야학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본과 1학년이라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었지만 84년부터 알게 된 학생들과의 정을 끊기는 쉽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한 아이, 자그마한 키에 핼쓱하고 여윈 선아라는 여공은 staire를 무척 따르는 편이었다.

 

 

선아에게서는 가끔 편지가 날아오기도 했다. 화사한 빛깔의 편지지와 약간 모가 져있긴 해도 예쁜 글씨에서는 그녀의 궁핍한 모습을 전혀 엿볼 수 없었다. 어느날의

 

편지 끄트머리에 붙은 한 구절, 이만 쓸께요. 불빛이 흐려서 눈이 아프거든요...

 

를 읽으며 비좁은 방에 쪼그리고 앉아 30촉 알전구의 침침한 불빛 아래 편지를 쓰는 선아의 모습을 떠올리긴 했지만.

 

 

한여름이었다. 방학을 맞은 staire  안심하고 야학에 다시 참가하게 된 85년의 여름.

 

 

수업을 하다가 선아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걸 보았다. 피곤한 몸으로 수업을 듣는 공원들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그냥 못 본체하며 넘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옆자리의 진경이가 그러는 거다.

 

"선생님! 선아 울어요. 아픈가봐요."

 

저런... 그러고보니 앞으로 옹송그려진 선아의 아랫배에 두 손이 가 있고 어깨가 들먹이고 있었다.

 

"선아야... 왜 그러니? 어디가 아파?"

 

"... 배가... 배가 너무 아파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선아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솔직이 말하자면 선아는 전혀 배가 아픈 아이처럼 보이지 않았던 거다. 하얗지만  까칠한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과 소리를 죽여  들먹이는 조그많고 동그란 어깨... 그건  격한 고통에 못이겨 우는 모습이라기보다는 깊은 서러움에 의한 울음으로 보이는 거다.

 

 

어쨌든 선아를 들쳐업고 가까운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복도의 긴 의자에 앉아 얼마나 기다렸을까. 의사 선생님이 staire를 불렀다.

 

"저 학생이랑 어떻게 돼요?"

 

"제가 가르치는... 야학에서 가르치는 아입니다."

 

"선생님인 셈이군요."

 

"..."

 

"저 학생은... 배가 아픈 게 아니에요."

 

"????"

 

"빈혈 기미가 있고 호흡기에 이상이 있는 것같긴 하지만 배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럼 왜...?"

 

"저 학생은 지금 누군가의 관심을 끌고 싶은 거죠."

 

"그럼 꾀병입니까?"

 

"꾀병은 아닙니다. 진짜로 아픈 거에요. 신경성이니 하는 것과는 종류가 다르지만 비슷하게 생각하면 돼요. 집안이 별로 윤택하지 못한 모양이죠? 가족 관계도 별로 좋지 않고."

 

 

집안이야 단칸방에 홀어머니와 남동생이랑 살고 있으니  윤택은커녕 빈민이라고 보는 게 옳겠고... 술과 도박과 가족들에 대한  손찌검으로 생애를 탕진한 끝에 공사판에서 죽은 아버지와  건달의 길로 빠져들고 있는 국민학교  6학년 남동생, 봉투를 붙이며 생계를 잇고 있지만 궁벽한 생활에 찌들어 잔신경질을 부리는 어머니...

 

 

"맞습니다..."

 

"그래서 아마 야학 선생님들이 이 학생에게는 딴 세상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르지요. 관심을 갖고 가까이 대하고 싶지만 맘대로 안되는... 꾀병하고는 달라요. 심리적인 통증이죠. 서운함과 상실감, 패배감... 이런 것들로 인해 위축된 사람은 자연히 움츠리게 됩니다. 배를 쓸어안게 되지요. 마음이 무거우니 어쩐지 배도 아픈 것같아요. 묵직하게. 그래서 더 움츠러들고 그럴수록 더 아픈 것같지요. 거기에다 심리적인 효과로 서러움이 가세를 하게 되고... 나중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상상의 고통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어요. 악순환이죠. 누가 끊어주기 전에는 스스로 빠져나오기 힘든..."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글쎄... 난 의사지 카운슬러가 아니니까... 일단 그 학생을 잘 대해주도록 해요. , 그리고 호흡기 쪽은 조금 더 검사를 해봐야 하겠군요..."

 

 

그날 선아는 응급실 침대에 누워 staire의 손을 꼭 잡고서 밤을 보냈다. 여윈 얼굴에 말라붙은 눈물자국을 내려다보며 손에 힘을 주었더니 이미 잠든 줄 알았던 선아도 수줍게 되쥐어 주었다. 선아의 입가에 미소가 스친 것같았다...

 

......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다. 아니, 조금 더 그 뒷이야기가 있지만 간단히 요약하기로 하자. 선아는 결핵을 앓고 있었다. 진단이 나온 즉시 직장을 잃은 선아는 그녀의 신도림동 단칸방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사라져버린 거다. 어디로? 돌아갈 고향 같은 것도 따로 없는 선아가 어머니와 동생을 두고 어디로 가버렸는지, 이제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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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는 2005년 5월 30일,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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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네.